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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작가의 2004년작 [고래]는 한국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400페이지 이상을 이야기의 힘만으로 밀어붙인 이 작품은 기존 한국문학에서 볼 수 없는 스타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죠.
천명관 작가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총잡이> <북경반점> 등 1990년대 한국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다가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문학을 하겠다는 각오라기보다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기존 문단과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자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천편일률적인 한국문학의 문체 중심주의, 내면 묘사 위주의 서사 전개, 현실에 기반한 엄숙주의 등의 관습에서 벗어나 천 작가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 결과는 아름다웠습니다.
[고래]가 나온지 12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천 작가는 [고령화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등을 내놓았고, 올해에는 카카오스토리에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라는 웹소설을 연재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고령화가족>은 송해성 감독이 영화화했고,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곽경택 감독이 영화화하려다 무산됐죠. 하지만 [고래]는 아직까지 영화화 시도가 없었습니다. 문단이 신(scene)처럼 구성돼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이미지로 남는 이 작품은 왜 그동안 영화화되지 않았을까요?
장진 감독은 "소설을 본 정도의 감흥이 나오지 않는다면 영화화할 수 없다"며 이 작품이 영화화하기 힘든 작품이라고 밝힌 적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래]야말로 꼭 영화로 보고 싶은 한국 소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래]가 등장할 때 자주 비교되며 언급됐던 고전소설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작가의 반대로 영화화할 수 없었지만 [고래]는 그런 사유로 영화화가 안되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 거대한 스케일의 프로덕션을 감당할 만한 영화사가 아직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닷가 마을, 벽돌 공장, 고래 극장, 붉은 벽돌의 대극장 등 큰 세트를 지어야 하고, 수많은 독특한 인물을 캐스팅해야 하며, 시대 고증에 필요한 의상과 미술 등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을텐데 정작 이야기는 흥행에 결격 사유가 많습니다. 1) 남자같은 여자가 주인공인데다, 2) <국제시장>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도 아니고, 3) 한국영화에서 가장 흥행하기 힘든 판타지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래]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웹툰만이 오로지 한국영화의 스토리 공급원인 시대, 한국문학이 가진 이야기의 힘을 보여줄 소설이 바로 [고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고래]가 영화화되면 좋은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혹시 아직 [고래]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세요. 손을 놓을 수 없을 만큼 흡인력 강하고, 직설적이고,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본능적이고, 해학적이고, 구전설화 같고, 야설 같고, 무협지 같고, 리얼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러면서 덧없을만큼 아무것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설이니까요.
[고래]가 영화회되길 바라는 다섯 가지 이유
1. 다채로운 캐릭터 무비
[고래]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의 열전입니다. 기골이 장대한 걱정과 춘희와 트럭운전수, 희대의 난봉꾼인 칼자국, 남다른 배포를 가진 금복, 벌과 하나된 애꾸눈, 이런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쌍둥이 자매, '젤리그' 같은 사기꾼인 약장수 등 캐릭터만 제대로 살려도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특별해 보이는 캐릭터들은 죄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 "그 대단한 고래도 결국 죽는다"는 아이러니가 이 소설의 키포인트니까요. 슈퍼히어로처럼 보이면서도 뭔가 비극적인 이런 인물들은 한국영화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것입니다.
Flying Elephant by Gregory Colbert
2. 순수한 판타지와 야설이 섞인 영화
벙어리 춘희와 점보 코끼리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춘희는 유일하게 코끼리하고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어린 춘희와 코끼리의 시점에서 시작해 끝나면 좋겠습니다. 순수한 춘희야말로 이 장황한 '구라' 같은 이야기를 전달할 적임자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순수하게만 나가면 [고래]의 진짜 맛을 잃는 거겠죠. 책은 성욕에 목마른 금복이 남자를 계속해서 갈아치우는 과정을 맛깔나게 묘사합니다. 이를 놓치지 않으면 영화는 순수한 에로티시즘을 담게 될 것입니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3. 마술적인 이미지가 담긴 시네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영화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였습니다.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일이 너무나 유쾌하게 진행되는 유럽영화죠. 3대에 걸친 가족사가 등장한다는 점도 [고래]와의 유사점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쿠스트리차의 방식으로 [고래]를 만든다면 아주 아름다운 영화가 될 겁니다. 점보 코끼리와 춘희가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특히 몽환적으로 보이겠죠.
다만 쿠스트리차 영화는 불친절하게 이미지로 설명하는 장면이 많아 흥행을 담보하기 어려운 만큼 몽환적인 이미지만 차용하고, 대신 코엔 형제의 <헤일, 시저!>처럼 코믹한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설명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소설 역시 수시로 화자가 등장해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데 마치 극장의 변사 역할 같은 그 화자의 말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내레이션 없이 드라마로만 이야기를 구성하면 빠른 진행이 힘듭니다. 가뜩이나 등장인물도 많기 때문에 정리가 필요하죠. 소설은 빠른 진행으로 수십 년의 시간을 넘나들었습니다. 영화는 이를 빠르고 경쾌한 편집의 리듬으로 살려야 합니다. 장엄한 서사를 2시간 속에 압축하기 위해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유자재로 시간을 건너뛸 필요가 있습니다.
Fail Whale by ka-92
4. 한국 근현대사를 해학으로 다룬 블랙코미디
한국전쟁부터 현대까지를 압축해 보여주며 한 인간의 적응기를 그린 <국제시장>은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평범한 영화였습니다. [고래]의 장점은 사라진 시골마을을 통해 근현대사를 풍자와 해학을 곁들여 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념대립, 완장을 찬 군인 등 때론 역사가 직접적으로 주인공의 삶에 개입합니다. 주인공은 무지해서, 혹은 이해할 수 없어서 이들을 무시하다가 호되게 당하기도 하고 한방 먹어주기도 하죠. 관객은 알고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알지 못할 때 그것은 묘한 아이러니를 남기는 웃음이 됩니다. 나혼자 구석기시대를 살아가는 춘희의 행동이 대표적입니다. 그녀가 벽돌에 남긴 그림이 현대 지식인들에 의해 고상한 의미로 해석되고, 시인이 뜻도 모를 애정시를 발표하는 장면은 이 소설을 멋진 블랙코미디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더 큰 웃음을 불러올 것입니다.
금복이 그린 고래와 개망초
5. 여성 3대를 다룬 대작
[고래]는 여성 3대의 이야기입니다. 박색인 노파, 여장부 금복, 통뼈 춘희는 3부작으로 이루어진 소설 각 챕터의 주연입니다. 남자가 주인공일 때와 달리 소수자인 여성이 극을 이끌고 가면 반드시 가족, 남자 등이 등장하는데요. 이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남자는 많이 나오지만 가족은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금복은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타고난 배짱으로 사업을 확장해 돈을 벌고, 직함을 스무 개 넘게 가진 마을의 유지가 되더니 결국 남자(!)가 되어 수련이라는 젊고 예쁜 여성을 탐합니다. 결국 금복의 파란만장한 삶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닌, 그때그때 자신이 가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인데요. 가령 우연히 본 영화와 고래에 꽂혀 고래 모양의 극장을 짓는다거나, 착실해 보이는 남자 문씨의 말만 믿고 세운 벽돌공장이 늪에 빠지자 전재산을 쏟아붓는 식이죠. 또 춘희는 아예 가정이라는 게 뭔지 모릅니다. 트럭운전수가 찾아와 사랑을 느끼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죠.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원초적 욕망에 의지해 살았을 뿐입니다. 박색인 노파마저도 순수히 욕망 때문에 거대한 사이즈의 양물을 가진 반편이를 차지하기 위해 꾀를 내죠.
이처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간 노파, 금복, 춘희의 이야기는 그것이 좋든 싫든 분명 이전 한국영화에 없던 새로운 여성상을 던져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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