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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숍 점원 출신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등장부터 요란했고,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킬빌>, <재키 브라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장고: 분노의 추적자> 등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아드레날린을 그대로 혈관에 주사하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타란티노는 최근 8번째 장편 영화 <헤이트풀8>을 내놓으며 이젠 거장 칭호가 어색하지 않게 되었는데요. 이 영화 개봉 전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10편의 장편만 만들고 감독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밝혀 많은 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죠.
저 역시 타란티노의 팬입니다. <저수지의 개들>을 여러 번 복사된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봤을 때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펄프 픽션>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뉴스를 처음 봤을 땐 키에슬롭스키의 <레드>를 밀어낸 영화가 도대체 어떤지 궁금해 개봉을 학수고대하기도 했는데요. 아직 학생이었지만 개봉 첫 날 영화를 보고 나선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한 동안 머리가 얼얼한 상태로 존 트라볼타의 저질 댄스를 따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타란티노는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왕년의 B급 스타들을 불러모아 장르의 복원을 시도했죠. 처음엔 팸 그리어의 액션 영화를 따라하더니 요즘엔 서부극을 다시 만들고 있습니다.
타란티노는 영화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학력도 변변찮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비디오 가게 점원일 뿐이었죠. 하지만 그는 직접 영화를 만들어 보면서 영화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글에선 타란티노가 스스로 터득한 영화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가 여러 매체와 한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8가지 포인트를 만들었습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1. 자신이 쓴 글을 친구들에게 읽어줘라
글을 쓸 때 우리는 대개 불안합니다. 과연 이게 재미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죠. 타란티노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로 오스카 각본상을 받았는데 그때 수상소감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친구들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글을 쓰면 그들에게 읽어줍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지적해주길 원하지는 않아요. 내가 이걸 읽으면 나는 그들의 귀를 통해 듣습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돼요. 당신들은 그게 얼마나 용기를 주는지 모를 거예요.”
단지 내가 쓴 글을 소리내어 읽고 그것을 가만히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거죠. 어떤 창조성 전문가는 이를 ‘텔레파시’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거기까진 모르겠고 분명한 건, 글을 소리내어 읽을 때 그 글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2. 머리통을 날려버릴 기세로 총을 뽑되 절대 쏘지는 말라
글을 쓸 때 우리는 총을 뽑아야 합니다. 머리통을 날려버릴 기세로 얼굴에 겨누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만큼 첫 문장부터 강렬하게 눈길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펄프 픽션> 첫 장면에서 펌킨과 허니버니의 대사 기억하시나요? “모두 꼼짝 마. 우린 강도다. 발가락만 움직여도 전부 머리통 날려버린다!” 정말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강력한 도입부입니다.
타란티노는 선댄스 영화제의 ‘Iconoclasts’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아주 악의적인 편지를 쓴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싸우지는 않았죠. 만약 당신이 진짜 예술가라면, 만약 당신이 만드는 영화가 커리어를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장전된 총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러면서 총을 그들의 얼굴에 겨눈다는 게 뭔지 알고 있어야 해요. 머리통을 날려버린다는 의미를 확실히 알죠? 그러니까 내 말은, 절대 총을 쏘지는 말라는 거예요. 쏘는 순간 그건 다른 게 돼요."
타란티노는 예술가와 커리어리스트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확신을 갖고 영감을 창작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커리어리스트는 자꾸만 현실적인 고려를 하기 때문에 목적지가 수시로 바뀌는 혼란스러운 사람입니다.
커리어리스트는 시나리오를 쓰며 장애물을 만들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뭔가 일어나야 해. 그걸 어떻게 만들지?" 하지만 진짜 장전된 총을 가진 예술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인공이 이거 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어려울까?"
창조적인 작가들은 폭발할 것 같은 기운을 가지고 글을 씁니다. 마치 곧바로 총을 꺼내 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쏘면 안 됩니다. 꼭 필요하기 전까지는 절대 방아쇠를 당겨선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총을 쏘면 그 총알은 불발탄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긴장감이 사라지면 이야기도 죽습니다.
3. 시나리오의 모든 페이지를 소설처럼 생각하라
소설과 시나리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카메라 기법 같은 시각적 구성요소의 유무에 있죠. 타란티노는 시나리오를 쓸 때 그런 시각적인 요소들은 다 무시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걸 신경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스토리를 놓친다는 것이죠. 그는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나리오의 모든 페이지를 소설처럼 생각하라. 그 페이지에서 일어날 사건이 뭔지 간결하게 써라. 영화적인 장치는 나중 문제다. 연출 기법을 생각하다보면 글 쓸 때 판단이 흐려진다. 이야기의 뼈대에 집중하라.”
결국 시나리오 역시 스토리텔링입니다. 현란한 카메라워킹과 액션은 부실한 스토리를 감추기 위한 테크닉이죠. 물론 이런 장인정신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스토리가 죽으면 전부 다 죽습니다.
생각해 보면 타란티노 영화는 굉장히 시각적인 한편으로 연극적 요소가 강합니다. 한 장소에서 인물의 대사와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씬이 많아요. 그건 그만큼 그가 스토리에 공을 들였다는 뜻일 겁니다.
타란티노는 21살때인 1984년 감독이 되기를 꿈꾸며 먼저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트루 로맨스>, <내추럴 본 킬러> 등이 그가 감독 되기 전에 쓴 시나리오들로 유명하지만 그는 그 작품이 나오기 전에도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사에 보냈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영화화되지 않았을 뿐이죠. 그는 10편의 장편영화를 만들고 은퇴한 후 소설과 연극 대본을 쓰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이야기를 만드는 매력에 탐닉하는 창작자입니다.
4. 영화 속에 나를 담아라
거의 모든 타란티노 영화들은 장르의 표준에서 파생했습니다. 하지만 타란티노만의 오리지널리티는 캐릭터를 개인화해 진짜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데서 옵니다. <킬 빌>은 경멸의 대상이 된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타란티노 자신이기도 합니다.
“내 영화는 개인적이다. 작품을 개인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얼마나 개인적인지 알려주려 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킬 빌>은 굉장히 개인적인 영화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에 그 자신을 담고 그것을 장르 안에 숨깁니다. 그의 인생에서 그가 겪은 것들에 대한 은유가 거기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장르 안에 숨겼기 때문에 관객은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타란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글을 쓸 때 내 안에서 재료로 삼았던 것은 영화 속에 조각난 채 담겨 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쓰면서 내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 뒤 헤어졌다면 그 조각들이 그 영화 속에 들어 있다. 그건 감추려할수록 더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쓰면서 얼마나 성장했나 따위의 질문은 허락하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주어진 장르 안에 개인적인 요소들을 집어넣을 때 탄생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또 장르의 특성을 빌리지 않으면 누구도 그것이 보편적이라고 느끼지 못하겠죠. 따라서 좋아하는 장르를 택해 그 안에 당신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시나리오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숨겨진 방법입니다. 타란티노의 진짜 재능은, 이러한 개인적인 요소들을 상상력을 이용해 한 장르 안에 거칠게 녹여넣는다는 것입니다.
5. 캐릭터를 낳고 사랑하고 헤어져라
1997년 <재키 브라운> 개봉 당시 찰리 로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타란티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가는 캐릭터의 아빠다. 배우는 캐릭터의 엄마다. 작가와 배우는 부모처럼 캐릭터를 잘 키워야 한다. 그래서 캐릭터가 성장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캐릭터는 작가 혼자 만드는 게 아닙니다. 배우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배우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쓴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작가가 홀로 양육권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캐릭터가 잡히면 캐릭터는 스스로 커갑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는 지점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억지로 바꾸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걸 타란티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캐릭터들을 한 방에 모아두고 말하도록 시킨다. 그러면 그들이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맞춰 알아서 나를 스토리로 가이드해준다."
6.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써라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거의 구어체 대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제 하는 말을 대사로 만듭니다. 대사는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말합니다. 논리적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어딘지 모순이 있는 사람들의 대화입니다.
사람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에둘러 말하거나 아니면 윤색합니다. 사람들은 문법을 지켜가며 말하지 않고 가끔은 TV 보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타란티노는 이런 실제 삶의 요소들을 예술의 형식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타란티노는 대사를 쓰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사를 쓸 때 소리내 읽어보라. 대사들은 드럼 비트처럼 리듬이 있어야 한다. 명심할 것은, 그 대사들이 플롯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또, 감정을 그대로 뱉어내는 대사만큼 영화를 망치는 건 없다. 살면서 감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 있나? 없다고? 그럼 쓰지 말라.”
7. 장르를 뒤집어라
"스토리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하지만 꼭 이 순서일 필요는 없다."
고다르가 한 말입니다. 타란티노는 이 철학을 그의 영화 속에서 제대로 실현한 감독입니다.
<저수지의 개들>은 단순한 범죄 스토리입니다. 인물들은 강도를 계획하고, 강도는 흩어지고, 경찰이 나타납니다. 이런 종류의 스토리는 이미 수백만 개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란티노 버전에선 이 스토리가 오리지널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일까요?
기본적으로 타란티노는 3장 구성의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그래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방식 역시 클리셰가 되었습니다만 <저수지의 개들>이 나올 때 이런 방식은 미국 영화 역사상 본 적 없던 시도였습니다. 또 독특한 캐릭터와 그들의 대화가 영화를 오리지널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미 누군가 다 썼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8. 훔치려면 완벽하게 훔쳐라
좋은 예술가는 빌리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칩니다. 어떤 평론가는 타란티노의 영화가 훔쳐온 장면이 너무 많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타란티노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적어도 나는 훔칠 때 정직하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다. 그렇다면 왜 직접적으로 가져오면 안되는가? 왜 비슷해 보이는 것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섞으면 안 되는가? 영화감독은 DJ와 비슷한 면이 있다.”
타란티노는 이왕 가져올 거면 제대로 훔치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훔쳐온 장면들을 자신의 영화 속에 아주 매끄럽게 집어넣습니다. 그의 영화들은 그가 좋아하는 홍콩영화, 일본영화, 미국 B급영화들의 상찬입니다만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베꼈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훔칠 수 있었을지에 더 감탄합니다. DJ들이 여러 곡들을 믹스해 자신만의 템포로 새로운 댄스곡을 만들 듯 타란티노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 믹스해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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