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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의 원래 제목은 <코인 로커 걸>이었습니다. <차이나타운>이라는 짝퉁스럽고 이질적인 제목보다 <코인 로커 걸>이라는 제목이 영화의 분위기와 더 맞습니다만 사실 둘다 이 영화의 제목으로는 별로입니다. <코인 로커 걸>은 왠지 일본 팝컬처 느낌이 나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드보일드한 이 영화의 제목은 훨씬 더 무정하게 갔어야 합니다. 이렇게 써놓고도 막상 저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이 영화 제작진의 고충을 이해할 만하군요.
지하철 사물함에 버려진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김영하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지하철 화장실에서 낳은 아이가 주인공이었는데 여기선 사물함 속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지하철 노숙자들 사이에서 길러지다가 어느날 차이나타운에 사는 마우희(김혜수)라는 사업가(?)에게 입양됩니다. 별명이 '엄마'인 마우희가 하는 사업은 고아들 지하철에서 구걸시키기, 돈 빌려주고 신체포기각서 받기, 돈 못 갚는 사람 죽여 장기 팔아넘기기 등입니다.
사물함 10번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름이 일영(김고은)인 여자 아이는 엄마 밑에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자랍니다. 일영은 배짱이 좋아 수금을 하러 나가면 어디서든 돈을 받아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수금을 하러 갔다가 채무자의 아들 박석현(박보검)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최현석 셰프의) 엘본 더 테이블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그 남자는 아주 친절했거든요. 하지만 남자의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버리고 잠적했고 엄마는 일영에게 칼을 주면서 석현의 수술을 맡깁니다.
<차이나타운>에서 부모는 모두 이런 식으로 그려집니다. 도망가거나 혹은 나쁜 짓을 시킨 뒤 쓸모없어지면 버리거나. 일말의 배려와 자비도 기대할 수 없는 야생입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가진 자에겐 시련이 찾아옵니다.
뒷부분부터는 영화를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스토리입니다. 일영은 당연히 석현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 파리 르 꼬르동 블뢰로 유학가려는 꿈을 꾸는 석현을 따라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영을 버립니다. 물지 않으면 물리는 세상에서 동정심은 싹을 잘라야 합니다. 하지만 일영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그녀 역시 이 구역 최고 우두머리의 딸입니다. 이제 일영의 복수가 시작되겠죠?
제가 영화 앞부분 스토리를 적으면서 고유명사를 자세히 적은 이유는 사실 박석현이라는 남자가 등장하는 장면이 조금 어설프기 때문입니다. 가난하면서도 너무 비현실적으로 친절하고 밝은 남자가 갑자기 등장하는데 영화는 그가 왜 일영에게 끌리는지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또 일영을 어릴때부터 좋아해온 우곤(엄태구)이 일영과 석현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영화는 생략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아주 잘 만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웰메이드라기엔 허점들이 많이 보이거든요. 군데군데 감정의 흐름이 튀기도 하고 내러티브가 비약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날이 바짝 서 있습니다. 이는 한국영화에서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긴장감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보다 약하고 <공모자들>보다 강한 그 중간 지점에 있는 영화라고 하면 될까요?
생략한 내러티브를 통해 영화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데서 오는 짜릿한 쾌감을 얻었습니다. 또 대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짧게 짧게 끊어쳐 한 마디마다 귀를 쫑끗 세우고 집중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일영이 탁(조복래)을 제거하고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통화하는 장면에서의 짧은 대사를 볼까요? 그 대사를 "엄마 짜장면 먹으러 갈게요"처럼 은유적으로 했으면 코믹 액션이 됐을테고 "지금 갈테니 거기서 기다리세요"처럼 장엄하게 했으면 감정소요가 심한 액션극이 됐을텐데 <차이나타운>의 일영은 가볍게 끊어서 이렇게 툭 내뱉습니다. "내가 갈 데가 어딨어요?"
엄마는 복수하러 온 일영에게 이렇게 말하죠. "한다, 안한다. 두 가지야. 해본다는 없어." 원래 조지 루카스가 청년시절 영화를 만들 때 한 말인데 영화가 차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하고 꽤 잘 어울리네요.
쓸모없으면 버려지는 자들의 세상, 돈(힘) 없는 자를 쉽게 죽이는 만큼 자신도 언제든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의 세상, <차이나타운>이 그리고 있는 하드보일드의 세계입니다. 이런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영화가 불편할 수 있겠습니다만, 코맥 맥카시 원작의 <카운슬러> <더 로드> 같은 쿨하고 잔인한 인간 본능에 충실한 세계에 빠져본 분들이라면 아주 뛰어나진 않더라도 제법 괜찮은 하드보일드 영화 한 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배경만 한국일 뿐 영화는 어느 나라를 배경으로 했어도 상관없을만큼 국적보다는 장르에 충실합니다.
김혜수는 엉덩이 뽕이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카리스마 넘쳤고요, 강인하면서 우수에 젖은 듯한 김고은의 눈매는 정말 좋네요. 쏭 역할의 이수경, 홍주 역할의 조현철은 신인답지 않은 과감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과감한 스타일의 이 영화를 데뷔작으로 선택한 한준희 감독은 다음 영화가 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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