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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CEO인 동시에 픽사의 최대주주이기도 했다. 잡스는 1985년 존 스컬리 CEO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난 뒤 재기를 노리던 중 픽사에 관심을 보였다. 잡스가 픽사를 찾은 것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잡스는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던 사람이고 그의 관심사는 당연히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어 애플에 복수하는 것이었다. 당시 픽사는 루카스필름의 컴퓨터그래픽 사업부로 애니메이션이 아닌 컴퓨터그래픽이 주업무였다.


픽사는 수입을 창출하지 못했기에 컴퓨터그래픽에 특화된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잡스는 여기에 관심이 있었다. 조지 루카스는 마침 이혼으로 자금이 필요해 픽사 그래픽스 그룹을 팔려고 매물로 내놓았다. GM, 필립스 등 대기업이 눈독을 들였지만 결국 픽사를 인수한 사람은 스티브 잡스 개인이었다. 애플 컴퓨터로 돈을 모은 잡스는 사재를 털어 픽사를 인수했다. 이때 픽사의 경영진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장편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픽사의 꿈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수하고보니 픽사의 컴퓨터는 지나치게 고사양이고 비싸서 잘 팔리지 않았다. 돈을 벌지 못하는데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제작비는 줄줄 샜다. 하지만 잡스는 약속을 지켰다. 꾸준하게 픽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1985년부터 시작해 첫번째 컴퓨터그래픽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수익을 내기까지 거의 10년 동안 꿈꾸느라 돈만 잡아먹는 기업을 이끌며 투잡을 뛰었다.


픽사를 인수한 이후 잡스는 넥스트라는 회사를 세웠고, 넥스트 컴퓨터는 잘 팔렸기에 더 이상 픽사가 하드웨어 판매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잡스는 픽사의 하드웨어 판매를 중단하고 장편 애니메이션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그는 해가 갈수록 정교하게 발전하는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이 결국 콘텐츠 시장을 지배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픽사의 운영진인 존 래스터 CCO와 에드 캣멀 CEO에게 전권을 주고 간섭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픽사는 이런 과정 끝에 만들어졌다.


에드 캣멀이 쓴 책 [창의성을 지휘하라]에는 그가 옆에서 보고 겪은 스티브 잡스에 대한 이야기가 후기의 한 챕터로 기록돼 있다. 그는 1985년 첫 만남 이후 26년 간 잡스와 함께 일해왔다. 잡스의 까탈스런 성격상 그와 26년을 함께 보낸 사람은 아마도 캣멀 외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애플에서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만 들어온 사람들에게 픽사의 CEO가 지켜본 잡스의 이야기는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 책을 참조해 픽사의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잡스와 달랐던 7가지 특징을 꼽아봤다.


에드 캣멀, 스티브 잡스, 존 래스터



1. 픽사에서 잡스는 듣는 법을 배웠다


잡스를 묘사한 책들은 대부분 극단적이고 까다로웠던 그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다. 캣멀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관철시키는 독불장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잡스는 듣기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언제 밀어붙이고, 언제 밀어붙이지 않을지 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자아를 성찰할 줄 아는 리더로 발전했다.


애플에서 그는 전문가였지만, 픽사에서 그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컴퓨터그래픽과 애니메이션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픽사 직원들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자제했다. 픽사에서 업무를 지시하거나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대신 직원들의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잡스의 최대 업적은 물론 애플이지만 픽사는 그가 긴장을 풀고 놀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픽사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능력을 개발해갔다. 픽사를 통해 그는 진정한 변화를 겪었고 더 현명해졌다.



2. 잡스는 열정을 가진 창작자를 존중했다


픽사는 두번째 장편 <벅스 라이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화면 사이즈를 놓고 내부 갈등을 겪었다. 제작진은 와이드스크린 포맷을 고집했고, 마케팅부서는 TV용 사이즈여야 DVD 판매가 쉬울 거라고 주장했다.


영화광이 아니었던 잡스는 와이드스크린 포맷은 금전적인 손해로 이어질 거라는 마케팅부서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때 제작 디자이너 빌 콘이 예술가의 관점에서 와이드스크린 포맷이 왜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빌 콘과 잡스는 한참동안 논쟁을 벌였다. 토론은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잡스는 이후 화면비율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이때 잡스는 돈의 논리를 계속 고집하다간 픽사의 창의성을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비전문가인 자신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픽사에 창의성을 유지시켰다.



3. 우주선을 닮은 애플 사옥 아이디어의 원천은 픽사 사옥이다


1990년대 중반 <토이스토리>의 대성공과 뉴욕증시 IPO로 규모가 커진 픽사는 사옥을 새로 짓기로 했다. 1998년 설계도를 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잡스는 제작팀마다 별도의 건물을 쓰는 설계안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도 직원들이 자주 만나게 하기 위해 화장실은 남녀 각각 한 개씩만 지었다.


하지만, 캣멀은 잡스의 설계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캣멀은 잡스를 버뱅크시에 있는 디즈니사의 노스사이드 건물로 데려갔다. 1940년대 록히드 마틴의 기밀부서 스컹크 워크가 제트기, 스텔스 전투기를 설계하던 곳이었던 이 건물에는 수백 명의 애니메이터가 한 지붕 아래서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캣멀은 잡스의 계획처럼 제작팀을 별도의 건물에 배정하면 그들이 고립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의 디즈니 직원들은 확 트인 건물 구조 덕분에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잡스는 그날 건물 견학을 통해 사람들이 섞여서 일하는 환경에서 창의성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 이후 잡스는 건물을 한 동만 건설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애플 캠퍼스2 조감도. 2013년 11월 착공, 2016년 4분기 완공 예정.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내부 모습.


4. 잡스는 픽사 감독들과 지속적으로 만났다


존 래스터, 앤드류 스탠튼, 브래드 버드, 피트 닥터 등 픽사에는 애니메이션 스타 감독이 많다. 잡스는 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아이언 자이언트>의 브래드 버드 감독은 원래 워너 브라더스에서 작품을 만들기로 했는데 잡스가 자신의 부인과 아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것에 감명받아 픽사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잡스가 영화감독들과 유대관계를 맺은 것은 단지 그들의 창의성과 리더십을 존중해서만은 아니었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잡스와 픽사의 감독들은 모두 아이디어를 버리는데 능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감독들은 브레인트러스트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발표해 반응이 좋지 않으면 곧바로 아이디어를 버린다. 잡스 역시 통하지 않는 아이디어를 버리는데 능했다. 누군가와 논쟁해서 자신이 설득당하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 그는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전력을 쏟았지만 아이디어를 관철하는 일에 자존심을 걸지는 않았다. 픽사 감독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동질감을 느꼈다.



5. 잡스의 연설 방식은 픽사의 스토리텔링에서 가져왔다


잡스는 늘 영화 제작 실무에 무지하다고 말했지만, 영화에서 관객의 호응을 얻는 스토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픽사 감독들이 스토리를 구상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잡스는 다음 생에는 픽사 감독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감독이 될 수 없었기에 잡스는 무대 위의 연기자가 됐다. 픽사에서 배운 스토리텔링을 청중 앞에서 더 효율적으로 말하는 프레젠테이션에 이용한 것이다. 그의 발표는 정교하고 치밀해서 한 편의 드라마틱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6. 잡스는 애플만큼이나 픽사를 자랑스러워했다


실용적이면서도 재미있는 것을 창조하길 갈망하던 잡스는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세상에 기여한다고 믿었다. 그는 애플 제품들이 아무리 혁신적이어도 결국 매립지에서 끝날 운명인 반면 픽사의 영화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종종 말했다. 그는 픽사의 영화들이 인생의 진실을 얘기하기에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자신의 핵심 업무로 여겼던 그는 자신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 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픽사에 참여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픽사에게 잡스는 계속 굴러가도록 돈을 대주는 후원자였고, 내부에선 건설적인 비평가였으며, 밖에선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였다. 1989년 <토이스토리> 제작에 착수할 때도 가장 먼저 격려해준 사람이 잡스였다. 잡스는 픽사를 디즈니에 매각할 때도 창의성을 유지하는 픽사만의 핵심 가치를 지키는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7. 잡스는 픽사에서는 버림받지 않았다


잡스는 1986년 2월 루카스필름 그래픽스 그룹을 인수하는 서류에 서명한 뒤 에드 캣멀과 앨비 레이 스미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계속 함께 해나갈텐데 내가 간곡하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킵시다." 자신이 세운 애플에서 버림받았던 아픔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잡스에겐 끝까지 함께할 의리가 중요했다. 이후 잡스와 픽사는 이 약속을 지켰다. 잡스는 픽사가 적자에 허덕여 문 닫기 일보직전에도 픽사를 포기하지 않았고, 픽사 역시 성공한 뒤에 잡스를 버리지 않았다.


잡스는 영화 내부 시사회 뒤 열린 회의에서 늘 다음과 같은 말로 발언을 시작했다. "난 사실 영화 제작자가 아니니 내 말을 모두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결코 겸손해본 적 없는 천재의 이 말은 아마도 애플에서 버림받았던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픽사의 감독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내뱉은 말들은 대부분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을 공격하는 비평은 기각되기 쉽다. 잡스는 영화 제작자들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그의 비평은 강력했다. 잡스가 논평한 모든 작품들은 그의 통찰력이라는 혜택을 입었다.


잡스 사후 5일 뒤 픽사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앤드루 스탠튼은 잡스가 "픽사의 창의성을 지켜준 방화벽"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뒤 연단에 오른 존 래스터는 잡스를 이렇게 추억했다. "픽사 초기에 스티브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직원이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 타는 걸 꺼렸습니다. 함께 꼭대기 층에 가다가 그 사이에 해고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웃음) 하지만 픽사가 컴퓨터 판매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진화함에 따라 스티브는 우리가 하는 일을 자신은 결코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런 깨달음이 결혼과 양육, 픽사 본사 건물 설계와 더불어 그가 경이로운 리더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고 믿습니다."



지금 픽사에는 스티브 잡스 빌딩이 있다. 잡스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세상을 바꾼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라는 발명품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정했고, 그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줬다. 잡스가 애플에서 만든 하드웨어들은 업그레이드를 계속해 언젠가 그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가 픽사에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콘텐츠들은 언제까지나 그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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