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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본래 종교와 종교인에 대해서 그다지 호감이 없는 편입니다.
우리나라에 하도 사이비 종교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선생의 마지막 일기를 읽으면서 어떤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읽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습니다. 신성한 소임으로 절대자에게 복종하고
이웃들을 위해 자신의 생을 아낌없이 바치는 성직자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김대중 선생을 폄훼하는
세력이 아직까지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라도 빨갱이'라는 박정희가 씌워 놓은 십자가의 굴레,
그 굴레에 평생을 모욕당했으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과 이 나라를 위해
수많은 큰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가 집권한 1998년 이후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라로 변했습니다.

외환위기에서 탈출하고, IT 벤처를 육성하고, 정치권에 새 피를 수혈하고,
남북정상회담으로 평화시대를 열고,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알리고,
표현의 자유를 통해 한류의 기반이 된 영화산업을 키우고,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4강 신화를 이루는데 적극 지원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스포츠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를 실현하기에 5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5년동안 이루어낸 것 만으로도 그는 30년간 대통령을 꿈꿀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시기, 질투하고 중상모략하는 소인배들은
그가 돈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샀고 노벨상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등
그의 업적을 깍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김대중 선생을 보면
김구 선생이 떠오릅니다. 김구 선생이 살던 시대를 살아보지 못해
그당시 분위기를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지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를 칭송하며 떠받드는 민족주의자들과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안달이 났던 친일파들.

결국 김구 선생은 암살당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역사는 그를 가슴에 묻고 친일파들은 반세기 동안을 득세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못다이룬 꿈을 김대중 선생이 50년 만에 싹을 틔웠습니다.
먼훗날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있다면
역사는 앞으로 김대중 선생을 초대 민주주의 정권의 아버지로 기억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김대중 선생의 놀라운 점은 그에게 핍박을 가했던 모든 사람을
그가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시절, 유일하게 박정희와 맞장 뜰 수 있었던 정치인 김대중,
그 때문에 살인미수, 납치, 가택연금 등 모진 박해를 받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예산을 지원하는 등 화해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동교동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용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두환조차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가장 좋았다고 회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친일파와 독재자들을 왜 용서하고 받아들였는지, 그때문에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대중 선생의 일기를 보면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건 신앙의 힘이더군요. 그가 죽음을 견뎌온 신앙의 힘,
15년간 신체가 구속당했을 때 빌고 또 빌었던 신앙의 힘이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처럼 그를 용서와 구원으로 나서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힘이 있구나"
그동안 사이비 종교인들 때문에 모르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서거하시기 직전까지 현정부에 날선 비판을 하시고,
민주주의와 남북관계의 후퇴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불의에 대항하는 양심이야말로 김대중 선생을
자발적으로 '선생'으로 부르게 만드는 힘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년에 보여주었던 안타까운 모습이나
김지하, 황석영 등의 변절과 대비되면서
김대중 선생은 변하지 않는 거목으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심어주었습니다.





김대중 시대를 공부했다는 노무현 대통령.
그동안의 정치역정에서 두 분이 사이가 안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두 분이 걸어온 길은 같은 길이었습니다.

남북정책의 이름이 달랐고 지역감정 타파의 방법이 달랐고
구시대 정치를 청산하는 수단이 달랐지만,
그것은 결국 평화의 길, 서민의 길, 민주주의의 길이었습니다.

돌이켜보건데 두 분이 집권했던 1998년부터 2007년은
대한민국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다시 이런 시대를 볼 수 있을까요?

조선의 역사를 보면 영조-정조로 이어지던 황금기가 지난 뒤
그후로 거의 200년간 왕의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암울하고 폐쇄적인 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김대중 선생 같은 큰 인물은 다시 나오기 힘들 겁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소탈하고 우직한 인물도 보기 힘들 겁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우리는 아마 지금 전환점에 서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김대중 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발전한다'는 구절을 믿고 싶습니다.
부디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분들의 큰 뜻에 눈뜰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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