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위플래쉬>가 박스오피스를 역주행하며 <킹스맨>을 제치고 5일간 흥행 1위에 올랐다. 관객 100만 명을 목전에 두고 있어 올해 개봉한 다양성영화 중에서는 단연 1위다.


이 영화의 흥행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입소문의 힘. 기자와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사전 시사회로 영화를 미리 본 사람들이 앞다투어 추천했고 SNS에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나도 “볼만한 영화 있냐”고 묻는 사람마다 “봐야할 영화가 있다”며 추천했을 정도니 잘 만든 콘텐츠의 힘은 이렇게 자발적인 참여를 이끈다.


둘째, 교육의 힘. 한 독일 유학생이 인터넷에 영화 속 플레처 선생과 비슷한 스파르타식 예술 교육을 받은 적 있어서 영화 감상이 괴로웠다는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영화 속 학생이 나중에 과연 플레처 같은 선생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되물었는데 학교와 군대에서 위계적인 교육과 훈련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위플래쉬>는 토론의 좋은 소재가 됐다. <명량> <인터스텔라>에 이어 또한번 교육의 힘이 한국에서 영화 흥행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셋째, 음악의 힘. 한국에서만 흥행하는 영화들 중엔 음악이 중요하게 쓰인 영화가 많다. <레미제라블> <겨울왕국> <비긴 어게인>이 유독 흥행한 나라도 한국이고 <수상한 그녀> <미녀는 괴로워>는 주인공이 가수가 되는 이야기다. <위플래쉬>는 드럼이 화려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줬다. 가히 드럼의 발견이라 할 만하다. 듀크 엘링턴의 ‘캐러밴’, 찰리 파커의 ‘도나 리’ 등 재즈 명곡들과 ‘더블타임 스윙’ 같은 연주법이 회자될 정도로 재즈 입문서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와 같은 흥행 원인과 함께 <위플래쉬>의 성공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더 있다. 바로 이 영화가 35억원이라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35억원이면 한국 상업영화로도 적은 예산인데 미국에서는 거의 초저예산 수준이다. 올해 서른 살의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2012년 18분짜리 단편영화로 만들어 선댄스영화제에 선보였는데 이때 심사위원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제작비를 투자받아 장편으로 키웠다. 그 결과 오스카 3개 부문 트로피와 흥행 돌풍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위플래쉬>는 1100만 달러 수입으로 제작비 대비 3배 수익을 거뒀다.


이런 열정 가득한 창작과정과 드라마틱한 성공담은 그러나 요즘 한국 영화계에선 보기 힘들다. 올해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면 2월 한국영화 관객 수가 805만 명으로 전년보다 186만 명 가량 줄었는데 비단 관객 수 뿐만 아니라 만듦새로도 점점 퇴보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영화 관계자들은 술자리에서도 <조선명탐정: 놉의 딸> <쎄씨봉> <허삼관> <내 심장을 쏴라> 등 올해 개봉한 영화들에 대해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잘 안 된 영화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는 문화가 몸에 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영화 자체가 그다지 언급할 만한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한 탓도 있다.


또 영화과 졸업생들도 세상을 놀래킬 영화를 만들겠다는 패기를 잃은지 오래여서 그들이 쓴 시나리오는 대기업 배급사들의 입맛에 맞춘 기획이 다수다. 그렇다고 오락영화로서 완성도가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닌 트렌드에 따른 그저그런 시나리오들이 대부분이다. 공무원과 대기업 공채에 수십만 명씩 몰리는 현상이 영화계라고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는 한국영화도 이젠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런 상황에서 다미엔 차젤레 같은 성공신화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보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도 '위플래쉬 신화'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5년의 이야기다. 당시 문화 개방이 본격화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 생겨났고 그 결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하고 '키노' '씨네21' 같은 영화잡지들이 창간하면서 문화 담론들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이듬해인 1996년 영화 사전검열이 폐지되면서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해에 홍상수 감독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김기덕 감독이 <악어>를 내놓으며 괴물 신인의 탄생을 알렸다. 류승완 감독은 한술 더 떠 공사장 잡역부, 호텔 청소부, 운전연습소 강사, 농수산물 시장 야채 운반 등 각종 직업을 전전하며 모은 돈으로 1996년 첫 단편영화 <변질헤드>를 만들었다. 그는 2000년 자신이 만든 단편 네 편을 묶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상업영화로 데뷔했는데 이 영화는 지금까지 한국영화 사상 가장 강렬한 데뷔작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 돌아보면 한국영화계에 ‘위플래쉬’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던 셈이다.


영화계 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이 시절은 새로움이 솟아나는 시기였다. 1994년 김훈과 김연수가 첫 소설을 발표했고, 1995년부터 1996년 사이에 은희경, 전경린, 하성란 같은 문학동네 작가들이 나란히 데뷔했으며, 김영하는 1996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신인작가상을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 박진영, 패닉 등이 데뷔한 것도 이 시기다. 기존의 주류 문화가 저항세대를 추억하는 회고담 일색이던 데 비해 90년대 중반부터는 이를 식상하게 여긴 젊은 창작자들이 개인주의와 독특한 감수성으로 무장해 새로운 작품을 내놓으며 판을 뒤집었다.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물결이 시작된 이 시기의 잔향은 요즘도 90년대를 추억하는 콘텐츠가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95년에 우뚝 솟은 뉴웨이브 체제로부터 이미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영화는 엇비슷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모바일의 등장이 한동안 침체돼 있던 스타트업 붐을 촉진시킨 것처럼 지금 한국영화도 매너리즘을 밟고 나아갈 새로운 위플래쉬 충격이 필요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