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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데뷔작이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단촐한 소품입니다. 감독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8일 만에 쓰고 겨우 120만 달러로 만들었다고 하죠. 개봉 수입은 1600만 달러였으니 10배 이상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원래 영상 편집을 했다는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를 접수하면서 단 한 작품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1989년 그때 그의 나이 26살이었죠.


영화의 주요 인물은 4명이고 거의 모든 장면에 그들만 등장합니다. 변호사 존(피터 갤러허)은 부인 앤(앤디 맥도웰)과 살고 있으면서 신시아(로라 산 지아코모)와 바람을 피웁니다. 신시아는 앤의 여동생인데 두 사람은 성격이 전혀 달라 자매로 보이지 않고 또 서로 잘 맞지도 않습니다. 앤은 정신과 상담을 하면서 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쑥쓰러워하는 정숙한 여자이지만 신시아는 활발하고 늘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개방적인 여자입니다. 그녀는 심지어 앤이 없을 때 그들이 사는 집으로 찾아가 존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구도 속에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존의 젊은 시절 친구인 그레이엄(제임스 스페이더)이 9년 만에 찾아와 이웃이 된 것입니다. 앤은 남편과 전혀 다른 그레이엄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앤이 호감 갖는 남자가 궁금했던 신시아 역시 그레이엄을 찾아갔다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레이엄이 없을 때, 존은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레이엄이 나타나면서 불안했던 균형은 깨집니다.


존은 열쇠를 많이 갖고 있고 또 갖고 싶어하는 남자지만 그레이엄은 다릅니다. 그는 한 개의 열쇠만을 갖기를 원합니다. 자동차, 집, 금고, 애인 등 계속해서 열쇠가 필요한 삶이 아니라 한 개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레이엄이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은 어느날 그가 발기 부전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입니다. 9년 전 그는 존과 매우 닮은 청년이었지만 그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것이 앤에게는 아주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결혼이라는 성 속에 갇혀 인형처럼 살고 있는 앤에게는 어쩌면 존과 전혀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력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앤은 그레이엄의 집에서 비디오테이프들을 발견합니다. 그레이엄은 여자들의 성에 관한 경험담을 인터뷰해 그것을 보면서 성적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신시아가 그레이엄을 찾아와 비디오테이프를 찍고 그 사실을 앤과 존에게 각각 털어놓습니다. 비디오테이프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앤은 존과 신시아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마침내 앤도 비디오테이프를 찍습니다. 그리고 존에게 이혼하자고 말합니다. 비디오테이프는 앤이 모르고 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 매개체가 됩니다.


그레이엄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은 무작정 그레이엄의 집을 찾아 앤이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봅니다. 질펀한 동영상을 예상했던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사로잡힌 여자와 옛 여자와의 기억을 잊지 못한 채 9년 동안 방황한 한 남자의 흔적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의 삶엔 어떤 열쇠가 필요하게 될까요?



이 영화는 강렬한 제목 만큼이나 시종일관 집중하게 하는 긴장감을 가진 작품입니다. 스토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각본은 단단하고 흡입력이 있습니다. 비디오테이프는 화면 속 화면이라는 장치로 인해 묘한 신비함으로 다가오고 그레이엄이라는 남자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로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를 움켜쥐고는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없던 스타일의 영화였고 낯선 이야기였기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위기의 주부들]의 무거운 버전 정도로 받아들여질 것 같습니다. 옆 집에 이사온 낯선 남자로 인해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플롯은 익숙하고, 비디오테이프는 갈등 유발을 위해 억지로 끼워맞춘 것 같습니다. 캐릭터, 스토리, 관계, 플롯 등 어느 하나 오래 회자될 만큼 특출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독특하고 강렬한 제목 만이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긴 영화는 아니라는 뜻이고 그것이 이 영화의 한계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엔딩이 공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친절함이 유행이 되어버린 1990년대 독립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어쨌든 상황을 정리해주면서 마무리하고 있거든요.


앤디 맥도웰과 제임스 스페이더의 풋풋하던 시절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몸매관리에 실패한 지금의 제임스 스페이더를 생각하면 이때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한 영화가 황금종려상과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은 당시 전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 이 영화는 파격 그 자체였는데 지금 아무도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제임스 스페이더의 사라진 머리숱과 늘어난 몸무게처럼 이 영화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없이 늙어버렸나 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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