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개봉 20일 만에 관객 1500만 명을 돌파한 `명량'은 '아웃라이어'다. 기존 흥행 추세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분포에서 벗어나 있다. 제작사를 비롯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흥행세다. 더 놀라운 점은 돌풍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1위를 내준 적 없고 평일에도 하루 30만 명씩의 관객을 추가하고 있다.
내달 초 <타짜 2>가 개봉하기 전까지 별다른 경쟁작도 보이지 않는다. 올해 추석이 예년보다 빠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추석 시즌에 또다시 관객을 쓸어모아 2000만 명까지 질주할 수도 있다. <명량>에게 걸림돌은 이미 1500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 뿐이다. 재관람률은 4%에 달하는데 이는 지금껏 재관람률이 가장 높았던 영화인 <겨울왕국>(8%)의 개봉 3주차 때보다 더 높은 수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관람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명량>이 <겨울왕국>의 기록을 깰 가능성도 높다.
4파전 예상 깬 군계일학
애초 <명량>은 <군도> <해적> <해무>와 함께 여름 시장에서 4파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막상 겨뤄보니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코미디로 승부한 <해적>만이 겨우 손익분기점에 근접했을 뿐 <군도>와 <해무>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특히 <신세계> <변호인> 등 작년 의미있는 흥행작을 내놓으며 배급사 관객 집계 1위에 오른 NEW의 실패가 눈에 띈다. <해무>는 작년 여름시장 승자인 <설국열차>의 배경을 바다로 옮겨온 영화다. 선상에서 막내 선원이 선장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닮았다. 스타 감독 봉준호가 제작에 참여했고 김윤석, 박유천 등 유명 배우들이 가세했다. 그러나 관객은 지나치게 무겁고 어두운 이 영화를 외면했다. 현재까지 관객 100만 명에 그쳐 처참할 정도다. 과거에 통했던 기획에 안주해 시장을 오판한 탓이다.
만약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한 네 편의 영화가 싸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면 CJ, 롯데, 쇼박스, NEW는 사이좋게 수익을 나눠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시장은 늘 기대를 배반한다. 현재까지 2500만 명의 관객이 네 편의 영화를 봤다. 그중 <명량>이 홀로 1500만 관객을 가져갔고, 나머지 1000만 관객을 <군도> <해적> <해무>가 나눠가졌다. 비유하자면 잘 나가는 큰 형이 파이를 키워서 먹고, 그 아래 삼남매가 남은 파이를 놓고 뺏어먹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10년 만에 다시 쓴 흥행 역사
<명량>은 독야청정 홀로 질주하고 있다. 기존 흥행 1위였던 <아바타>는 개봉 20일 시점에 700만 명을 동원했었고, 2위 <괴물>은 984만 명, 3위 <도둑들>은 975만 명을 불러모았었다. <명량>은 기존 흥행 1위보다 무려 두 배, 2,3위에 비교해서는 50% 많은 스코어를 기록중이다. 특히 관객 수 1300만 명대는 <괴물>이 2006년 기록한 이래 8년 간 깨지지 않던 ‘넘사벽’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한국영화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 대비 한계치가 1300만 명이라고 적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기록이 깨진 것이다.
과거에도 아웃라이어가 있었다. 1993년 <서편제>가 사상 첫 100만 명을 돌파했고, 1999년 <쉬리>가 500만명, 2004년 <실미도>가 1000만 명을 넘기며 역사를 써나갔다. 500만 명 단위의 흥행 갱신 역사에서 <명량>은 10년 만에 이룬 성과다. 이제 한국 영화는 <명량>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영화계의 빅뱅 파괴자, 명량
<명량>의 성공 배경을 놓고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됐지만 대부분 '입소문'과 '물량공세', '중년관객'으로 기존 영화의 성공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량>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전국민의 1/3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이 돌풍은 기존에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분석도 좀 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등장하자마자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완전히 재편한다는 점에서 <명량>은 '킬러 앱'이다. '앵그리 버드'가 출시 사흘 만에 1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던 것처럼, 싸이가 유튜브를 타고 월드스타로 뻗어나갔던 것처럼, <명량> 역시 순식간에 기존 영화시장을 뒤흔들었다.
'킬러 앱'을 처음 소개한 래리 다운즈는 새 저서 [어떻게 그들은 한순간에 시장을 장악하는가]에서 순식간에 시장을 초토화시키는 제품을 '빅뱅 파괴자'라고 정의했다. 이들은 기존의 '파괴적 혁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초토화 혁신'을 이끌어낸다. 그는 빅뱅 파괴자의 특징 몇 가지를 제시했는데, 일부가 아닌 모든 사용자에게 맞춤형일 것,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전략을 갖출 것, 부담에 구애받지 않고 개발할 것, 그리고 한 방향이 아닌 전 방향에서 거침없이 성장할 것 등이다.
이를 <명량>에 대입해보면 ‘초대박’의 이유가 만들어진다. 우선, <명량>은 일부 관객이 아닌 전세대를 관객으로 흡수했고, 기존 한국영화의 흥행요소인 드라마와 코미디를 빼고 이순신 캐릭터와 전투 장면에 집중하는 유연한 전략을 택했으며, 이순신이 갖는 무게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에 영화 자체만의 매력이 아닌, 역사, 교육, 기업경영, 한일관계 등 다양한 방향에서 복합적으로 '버즈'를 일으켜 탄력받은 것도 거침없는 질주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책의 저자가 또 한가지 강조한 게 있다. 빅뱅 파괴의 시대에 산업주기는 급격한 상승곡선과 가파른 하강곡선을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주기를 ‘상어 지느러미’라고 표현했는데, 개봉 초반 압도적인 기세로 출발한 <군도>가 1주일 만에 탄력을 잃고 급강하한 것을 보면 영화시장 역시 점점 상어 지느러미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 듯 보인다. <명량>이 어느 정도의 뒷심을 발휘할 지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먼 곳에서 찾은 리더, 이순신과 교황
과거 흥행의 역사를 바꾼 영화들은 영화 자체의 힘만으로 벽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서편제>는 옛 것에 대한 향수, <쉬리>는 할리우드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실미도>는 감춰진 과거에 맞서는 시대정신이 도화선이 됐다. 같은 맥락에서 <명량>에는 국난극복의 상징적 리더 이순신이 있었다.
물론 한국인에게 이순신은 낯선 존재가 아니다. 서울 충무로에서 통영, 여수까지 상징적인 '이순신'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명량>을 통해 한국인은 신화에 갇혀 있던 이순신을 지금 여기 살아 있는 리더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이순신 강연이 펼쳐지고 이순신 리더십 배우기에 한창이다. 이순신을 그리워하고 또 이순신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런 갈망의 이면에는 제역할 하는 리더가 없다는 현실에 대한 푸념이 있다.
최근 이런 갈망의 실체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에 한국인이 보여준 열광이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세월호 유족을 비롯해 위안부 할머니, 밀양과 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희생자, 쌍용차 해고노동자, 장애인, 새터민 등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는 자들의 손을 잡아주었고 용서와 소통을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진정한 리더를 보았다며 감탄했다. 한국의 리더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교황이 대신 해준 셈이다.
교황에 대한 이런 뜨거운 반응은 <명량>의 압도적 흥행세와 닮았다. 대중은 교황과 함께 이순신을 또하나의 리더의 표본으로 재발견한 것이다. 한 사람은 저멀리 바티칸에서, 또 한 사람은 400여년 전 역사 속에서 왔다는 점에서, 시공간을 거슬러 먼 곳에서 찾은 리더다.
자신을 낮추고,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말보다 실천이 앞선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한 사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일촉즉발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냈고, 또 한 사람은 부패와 불신으로 위기에 빠진 카톨릭을 개혁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이순신과 교황에 대한 열광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정신적으로 메말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명량>의 개봉일은 재보선이 있던 날이기도 했는데 그날 투표율은 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그만큼 현실 정치는 외면하면서 이상적인 리더상에만 매몰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 리더에게 기대하는 것은 미래의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 아닌, 당장 내 가슴을 보듬어주는 위로다. 고단한 마음을 녹이고 힐링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 시장을 초토화시킨 <명량>의 빅뱅 파괴적 흥행세는 한국 사회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