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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저희 호텔은 알프스 산맥 주브로브카의 온천 도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페니큘라를 타고 산 꼭대기까지 올라오시면 핑크색으로 한껏 멋을 낸 호텔 외관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겨울에는 핑크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에 덮이기도 하는데 옛날 전쟁이 났을 땐 파시스트들이 호텔을 야영지로 사용하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인 'ZZ' 휘장을 내걸었던 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밖에서 보는 호텔 만큼이나 내부 역시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분위기에 큼직큼직한 시설을 자랑합니다. 공중 목욕시설, 연회시설, 격조높은 응접실까지 고풍스러운 멋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멘들의 예쁜 박스에 담긴 슈도 호텔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했습니다. 친절한 저희 로비보이와 콘시에르주가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호텔에 투숙객이 많지 않다고요? 네, 대부분 산 위의 고독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과묵한 손님들입니다. 최근 찾아오는 사람이 뜸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소문난 부자들이 저희 호텔의 단골 손님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작고한 호텔 지배인이었던 구스타브 씨는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멋쟁이였어요. 많은 중년의 부유한 부인들이 그와 친구가 되었답니다. 물론 구스타브 씨가 유산을 노리고 돈 많고 나이 많은 미망인들에게 접근했다는 식의 비난도 있습니다만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가 전쟁기간 내내 누명을 쓰고 쫓겨다닐 이유는 없었겠죠.


84세의 미망인이자 유럽의 최고 갑부인 마담 D 역시 저희 호텔의 단골이셨어요. 그녀는 구스타브 클림트 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헤어와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요. 돌아가시면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명화를 구스타브 씨에게 남겼어요. 저희 호텔의 옛 지배인 구스타브 씨요! 저는 그림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라요. 사람들이 유명하고 비싼 거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어떤 유명한 작가분은 피카소가 그린 '파이프를 든 소년'이 이 그림과 비슷하다고 하던데요.


어쨌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그림이 전혀 모르는 남자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이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담 D의 아들 드미트리가 구스타브 씨에게 마담 D 살해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구스타브 씨가 아주 곤욕을 치뤘죠. 당시 로비보이였던 지금의 저희 제로 사장님은 구스타브 씨를 따라 국경을 넘나들며 도망다녀야 했다고 해요. 드미트리가 보낸 킬러는 마담 D 유서의 진실을 알고 있던 서지 X까지 죽였어요. 그래서 오기가 생긴 제로 사장님과 구스타브 씨는 그 킬러를 쫓아갔죠. 사장님이 썰매를 타고 달리던 그 이야기를 얼마나 자세하게 해줬는지 저까지도 그 순간이 생생하네요. 최근에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도 스키를 탄 늑대가 한 마리 나오더군요. 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당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어요.



드미트리는 파시스트 완장을 차고 호텔을 접수하면서까지 구스타브 씨를 압박했는데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행히 새로운 유언장이 발견되면서 구스타브 씨는 결국 누명을 벗게 됐죠. 마담 D는 모든 재산을 구스타브 씨에게 남겼고 구스타브 씨는 총에 맞아 돌아가시면서 그 재산을 제로 사장님에게 남겼답니다. 그렇게 대물림되며 그랜드 부다페스트는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희 호텔 곳곳에서 그 파란만장한 역사를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제로 사장님은 가끔 응접 소파에 앉아 감회에 젖어들곤 하는데 여기 호텔 투숙객 분들이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 스토리를 다 알 정도예요.


앞서 언급했던 유명한 작가분은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서 더 유명해지셨습니다. 그 분은 젊은 시절엔 주드 로를 닮을 정도로 잘생겼었다고 하는데 저는 돌아가시기 전에만 잠깐 뵀는데 톰 윌킨슨을 더 닮았던데요. 그러고보니 그 작가분은 구스타브 이야기를 쓰면서 슈테판 즈바이크라는 작가를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했다가 아내와 동반자살했다고 하는 작가 말이에요. 호텔 바깥 세상 사람들은 다 옛날 이야기일 뿐이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우리 호텔은 그 모든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답니다.


아, 잊지 마세요. 저희 호텔 이름이 그랜드 부다페스트라고 해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드카 이름이 더 어울리는 나라 주브로브카에 있습니다. 페니큘라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에요. 페니큘라를 어디서 타냐고요? 생전에 톰 윌킨슨을 닮았던 위대한 작가의 묘지 앞에 가면 꽃을 든 소녀가 있을 거예요. 그 소녀에게 물어보세요. 과거로의 정착역을 두 번 갈아타야만 오실 수 있답니다. 찾아오긴 어렵지만 한 번 오시면 호텔의 마력에 흠뻑 빠져서 체크아웃하기 싫으실 걸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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