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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면서 허무함과 신비함이 동시에 교차했던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는 남미 대륙을 여행하는 23살 청년들의 이야기였는데 그 의대생이 훗날 체 게바라로 성장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내러티브도 찾을 수 없는 일종의 감성 일기였다. 그가 체 게바라의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아우라'로 작용하였고 나는 그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 바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스크린에 내려앉은 그 후광은 가끔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저 어느 무명 씨가 남미를 여행하며 겪은 감상이었다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마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살아있는 계란이 죽은 바위를 넘는다며?"


<변호인>은 노무현이 노무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일종의 노무현판 '프리퀼'이다. 송우석(송강호 분)의 실제 모델이 노무현이라는 것을 모르는 관객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노무현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계속 그것이 신경쓰인다. "잘 만들었을까. 어느 부분이 비슷할까. 너무 미화되거나 혹은 왜곡된 건 아닐까." 아마도 넬슨 만델라나 버락 오바마를 모델로 했다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에서 유명 인사를 모델로 한 영화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논쟁이 불가피한데다 누구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을 한국인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은 자서전이나 위인전 밖에 없는데 둘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기보다 어느 정도 미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독자도 한정된다. 서구사회에서 인물에 대한 글이 많이 쓰이고 읽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최근에도 <링컨> <잡스> 등 할리우드에서는 꾸준히 전기 영화가 만들어지지만 한국영화에 전기 영화가 거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인>은 고졸 변호사 송우석이 법조계의 블루오션인 부동산 등기와 세무에 뛰어들어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어느날 시국사건을 맡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보통 성인이 된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데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가진 뒤에도 인생의 대전환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드라마가 탐내는 소재일 것이다. 일명 '부림사건'이라 불리는 부산 학림사건은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의 학생과 교사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두달간 강제구금, 고문한 사건이다.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인 최병국이 총지휘했고 김광일, 문재인, 노무현이 변호를 맡았다. 영화는 송우석이 인권변호사가 되는 과정을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감상적으로 보여주는데 송강호라는 배우 역시 아우라가 있는 인물이어서 그 연기의 폭이 노무현을 들었다 놨다 한다.


영화에서 송우석은 공안당국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변호한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의 사상에 문제가 없는데 검사와 경찰이 인권을 유린하며 없는 죄를 만들었다고 역설한다. 아마도 이 지점이 이 영화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한국 정치의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영이 시로 쓴 것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처벌받지 않을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송우석이 입증하는 것은 학생들이 읽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E.H.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영국대사관의 확인서와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권투 경기에서 알리를 응원하는 것도 김일성 찬양이 되느냐는 '빨갱이' 프레임에 갇힌 논리 뿐이다. 결국 그로부터 30년 후 군사정권은 몰락했지만 '빨갱이' 프레임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유령처럼 휘감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


극적인 장치를 위해 과장됐겠지만 송우석은 같은 날 서로 다른 두 인생의 갈림길에 선다. 하나는 굴지의 건설사 세무 변호사로 탄탄대로를 활보하는 길이고 또하나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을 변호하는 고난의 길이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그가 후자를 선택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잘 와닿지는 않았다. 리영희와 E.H.카의 책을 읽으며 의식화된 것, 어려울 때 도와줬던 국밥집 아주머니 순애(김영애 분)와의 정, 박진우(시원 분)가 고문받은 흔적 등 그런 이유들은 사실 사후합리화에 불과하다. 아마도 송우석의 인생이 바뀌게 된 진짜 이유는 그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궤변 같지만 송우석은 법정에서 피해자를 대신해 흥분하고 소리지르고 다른 변호사들보다 열심히 증거를 찾아나선다. 그 행동은 고졸 출신으로 부산 변호사 사회에서 겪었던 열등감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변호사나 되는 지식인이면서도 시국을 모른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마음에 들었다. 1987년 송우석은 박종철 영정사진을 들고 홀로 도로 한복판에 앉아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들과 맞장뜬다. 살아있는 계란이 죽은 바위를 뛰어넘는 순간이며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열등감과 자괴감을 극복하는 순간이다. 송우석을 변호하기 위해 법정에 참석한 99명의 변호사들의 이름이 불리워질 때 그 이름들은 그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변호사'가 아닌 '변호인'이 된 것은 송우석의 뒤에서 일어서는 99명의 변호인들에 혹시 영화를 관람하는 당신도 포함되지 않겠느냐는 중의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홀로 외롭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 시선들은 용기가 되고 힘이 된다. 노무현의 삶이 그렇기도 했지만, 결국 진심은 울림이 크다.


더 읽을 글 >> 변호인, 어디까지 실화일까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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