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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방의 선물>
올해 영화 관객은 2억 명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그중 한국영화 점유율은 60%를 넘어서며 영화시장을 이끌었다. 관객 2억 명이면 한국인 4명 중 1명 꼴로 극장에 간 셈이고 극장 매출 규모는 1조 5천억원에 육박한다. 지난 2011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영화시장 규모를 3년내 1조 5천억원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을 감안하면 극장 수입만으로 목표에 다가선 셈이다. 여기에 굿다운로드 캠페인과 IPTV 시장의 확대로 올해 영화의 디지털 부가시장이 상반기에 전년대비 30% 성장한 1200억원에 달하고 영화 수출액도 200억원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대략적으로 계산한 올해 한국영화 시장 규모는 1조 8천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3년 전 1조 2천억 원이었던 것에 비해 50% 가량 늘어난 수치다.
왜 영화 시장이 커질까? 아니, 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주 영화를 볼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과거 영화를 좋아하던 20대가 지금 한국사회의 주요 소비계층인 30대와 40대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최근엔 <러브레터> <그랑블루> <올드보이>처럼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유행하던 영화의 재개봉이 확산돼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3040이 20대였을 때 영화는 대중문화이자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예컨대 1990년대를 회고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들은 영화 동아리에 가입해 있다. 그들은 당시 출간됐던 영화잡지 [키노]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일본영화 <러브레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문화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1990년대의 20대들은 개방되어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그들의 해방구로 받아들였다. 수입금지됐던 영화가 정식으로 극장에 걸리면서 이전 세대가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됐다는 해방감은 젊은이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희생> 같은 예술영화가 10만 관객을 동원한 것도 1990년대였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접속>
한국영화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영화 유학을 하고 온 감독과 평론가가 등장했고, 본격적인 영화 교육기관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 출범했으며, 깊이 있는 영화잡지가 탄생했고, 부산국제영화제가 닻을 올렸다.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영화는 '방화'라는 이름으로 홀대받았지만, 1993년 <서편제> <투캅스>부터 조금씩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1994년 <게임의 법칙> <장미빛 인생>으로 시선이 달라졌다. 본격적인 전환점은 1997년 <접속> <비트>였다. 두 편의 스타일리쉬한 영화는 이제 한국영화도 유행을 선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접속>의 한석규처럼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서성이고 <비트>의 정우성처럼 오토바이를 타며 팔을 뻗었는지 모른다.
그뒤 외환위기 속에서 등장한 <쉬리>는 한국영화도 블록버스터로 나아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영화였다. 몇 백만 관객이라는 숫자가 등장한 것도 <쉬리>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 한국영화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서편제>의 103만 명이었다. 당시만해도 전국 집계가 없어 이 숫자는 서울 관객수다. <쉬리>는 서울 244만 명, 전국 추산으로는 620만 명을 동원했으니 당시 이 영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쉬리>를 만든 강제규 감독은 충무로에서도 비주류였다. 그런 그가 할리우드와 맞짱뜨겠다고 서울 월드컵경기장을 빌려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냈고 젊은 관객들은 이 영화에 열광했다. <쉬리>의 기념비적인 흥행 성공은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한국인들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지지해주었기에 가능했고 이같은 애국심 마케팅은 이후 대작 영화들에 공공연하게 사용됐다.
<쉬리>
1999년부터 2004년까지 5년은 한국영화의 황금기이자 춘추전국시대였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영화가 골고루 만들어졌고 관객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등 기념비적인 영화들이 이때 쏟아졌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아유레디?>처럼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만든 영화가 쫄딱 망해 전설로 남은 것도 이 시기다. 말하자면 이때 한국영화는 일종의 용광로였다. 눈먼 돈이 영화계에 들어 왔지만 막상 뭐가 돈이 되는지는 잘 몰랐다. 투자했다가 흥행 실패하고 짐 싼 창투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손을 뗀 것도 이 시기다. 순진한 만큼 순수해서 창작자들은 마음껏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요즘 한국영화의 감독들과 비교해보면 과할 정도로 창작의 자유가 주어졌던 셈이다.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류승완, 허진호 등 이때 스타가 된 감독들은 여전히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특유의 스타덤으로 3040 관객들을 이끌고 있다.
<올드보이>
그러나 3040 관객이 향수 어린 마음으로 한국영화에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해도 정작 콘텐츠가 좋지 않다면 이토록 영화산업이 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화산업은 야구의 타자와 비슷한 속성이 있다. 즉, 야구에서 3할 타자가 수위타자인 것처럼 영화에서도 10편 만들어 2~3편 성공시키면 나머지 흥행 실패한 영화의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더 많은 흥행실패를 견뎌야 하는 만큼 영화계는 이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매뉴얼을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아무래도 그 매뉴얼은 자금력과 고급인력을 갖춘 대기업일수록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의 한국영화계가 CJ, 롯데, 오리온 등 대기업 위주로 재편된 이유다.
배급사별 관객 점유율이 집계된 2008년 이후 CJ는 한 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올해는 중소 배급사 N.E.W의 파란으로 1위 자리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관객이 좋아하는 요소에 따라 스토리를 만들고, 캐스팅에도 관객 성향을 반영하는 등 통계를 적극 활용한 제작방식이 있다. 예전의 한국영화가 감독 위주의 시스템이었다면 지금의 한국영화는 투자사 위주의 시스템이다. 작년에 벌어졌던 영화 <스파이> 제작사의 이명세 감독 해고 사태는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뉴얼대로 찍지 않는 감독에게 투자사는 더이상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얻은 것은 안정적인 흥행성적이고 잃은 것은 한국영화의 독창성이다. 이는 할리우드가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겪었던 것과 비슷한 시행착오다. 한국영화는 결국 천재적인 개개인의 작가주의에서 벗어나 프로듀서가 중심이 되는 시스템의 영화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7번방의 선물>
그렇다면 앞으로도 한국영화는 계속 성장할까? 1인당 1년에 평균 4회 관람이라는 숫자는 영화 선진국인 미국, 프랑스에 버금가는 숫자다. 극장 수입으로는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말이다. 이제 영화시장의 규모가 커지려면 부가판권 시장이 커져야 한다. DVD, 블루레이 등 매체 시장은 여전히 침체인 반면 다행히 IPTV 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다. 또 수출 시장이 커져야 한다. 최근 합작 영화가 늘어나면서 수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다. 여기에 덧붙여 상업영화가 소홀히 하고 있는 감독의 독창적인 시도를 대신해줄 독립영화 시장이 커져야 한다. 그래서 상업영화를 끊임없이 자극해야 한다. 또 대부분 계약직인 영화인들의 복지를 개선해 유능한 스탭들이 창작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 위주의 시장으로 자리 잡은 한국영화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이런 상생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영화계에 대기업은 양면적인 존재다. 관객 입맛에 맞는 영화를 찍어내 스크린을 독점하는 포식자이면서 한편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극장을 동원해 영화의 제작, 배급과정을 수직계열화했다는 비판 속에서도 어쨌든 그들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모으고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안정지향 위주의 라인업에 있다. 1200만 관객을 기록한 <7번방의 선물> 등으로 올해 CJ와 함께 관객 점유율 1위를 다투고 있는 중소 배급사 N.E.W의 성공사례는 대기업에 분명한 자극제가 될 것이다. <신세계> <감시자들> <숨바꼭질> 등 N.E.W의 영화들은 <설국열차> <관상> <베를린> 등 CJ의 영화들보다 조금 더 도전적이고 모험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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