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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TV 코너에 글을 씁니다. 사실 할 이야기는 단편적으로 꽤 있었는데 TV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라서 괜히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워낙 TV 리뷰어들이 많아서 겹칠 것 같기도 했고요. 하지만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에 대해서는 뒤늦게라도 리뷰를 남기려 합니다.
1.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인생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이야기 말이에요. 난니 모레티는 <아들의 방>에서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들이 죽지 않았을텐데"라고 아들의 죽음을 부른 사건들을 회상하며 시종일관 괴로워했고, 이휘재는 [인생극장]에서 "그래 선택했어!"라고 외치며 서로 다른 삶을 살았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죠. 우리 인생에도 선택의 순간들이 몇 번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선택을 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그때 나의 선택 만은 아닙니다. 타인의 선택 역시 나의 현재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때 그 사람, 혹은 지금 그 사람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기에 지금 내 곁에 있거나 혹은 떠나간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경우의 수를 곱하면... 컴퓨터가 힘들어 하겠네요.
2. 한편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떤 격언에 "누구나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죠. 그런데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은 그 세 번의 기회를 지나가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아직 한 번의 기회는 남았다고요. 일반적인 현대인의 경우, 인생에서 선택의 기회는 학창시절에 한 번, 배우자를 고를 때 한 번, 그리고 직업을 고를 때 한 번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들은 이 선택의 순간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크게 바뀔 시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인생이라는 것은 바뀌기 쉽지 않아요. 사람의 성향이라는 게 있어서 선택의 폭은 좁아집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갑자기 신내림을 하지 않는 한 말이에요.
3. 시간여행을 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은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찾은 향이 20년 전으로 10분~30분 간 시간여행을 하게 해준다는 설정입니다. 사실 주인공 박선우 기자(이진욱 분)는 아홉 번 이상의 시간여행을 하고, 또 갈 때마다 체류시간이 달라지고, 또 어떤 물건은 가져오고 어떤 물건은 가져오지 못하는 등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이지만, 드라마의 몰입에 아주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8회까지는 과거를 바꾸면 현재가 바뀌는 <나비효과> 같은 이야기였는데 9회부터는 갑자기 20년 전과 현재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는 <평행이론>으로 바뀌는 것은 많이 이상하죠. 그러다가 19회부터는 다시 <나비효과>의 아련한 로맨스(이 영화에선 여자를 아예 만나지 않아 인연을 끊어버리죠)를 살짝 뒤집은 귀여운 로맨스로 바뀝니다. 뭔가 좀 석연치 않지만 어쨌든 스토리텔링으로 돌파하는 힘은 강력합니다. 사실 허구의 판타지도 팩트에 철저하게 기반해 설계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을 믿게할 수 있어요. [나인]은 스토리의 몰아치는 힘으로 무수한 약점들을 강력하게 돌파하고 있지만, 애초에 허점들을 보완할 기술적 장치들을 만들어 두었다면 더 좋았겠죠.
4. 타임머신이 발명돼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사람들은 무얼 가장 먼저 하고 싶어할까요? 주식이나 복권 같은 돈을 벌 정보를 전달하려 할까요? 그때의 나에게 더 현명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때 그 여자 혹은 그 남자를 꼭 붙잡으라고 충고할까요? 언젠가부터 타임슬립이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됐죠. 이번달 개봉하는 <열한시>도 타임슬립 소재의 한국영화입니다. 정작 소설에는 나오지 않은 지 한참 됐는데 아직 영상매체는 타임머신에 구미가 당기나 봅니다. <백투더 퓨처>처럼 과거로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방해하면 지금의 자신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타임머신이라는 기계 자체는 앞으로도 영원히 개발되기 힘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을 영화화한 <타임코드>에도 나오지만 백악기로 가서 낙엽 하나만 잘못 밟고 돌아와도 그로부터 1억년 후의 현재가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요. 혹시라도 운석이 떨어지지 않아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인간은 이렇게 번식하지도 못했겠죠. 아마도 그런 두려움 때문에 많은 타임머신 영화들이 어떻게 해도 결국 현재는 그대로라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가 봅니다. 그때 죽은 그 사람은 죽을 운명이었고, 주인공과 그 여자는 헤어질 운명이었고 등등 말이에요.
5. <동감>에서 유지태와 김하늘은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절대로 돈 되는 정보(?)는 궁금해하지 않기로요. [나인]에서 박선우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결혼은 했는지 직업은 뭔지 같은 현실적인 궁금증을 가질 과거의 자신에게 "그런 건 좀 그렇잖아" 하면서 넘어갑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제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그런 게 제일 궁금할 것 같습니다. 누구를 만나야 할지, 뭘 하면 돈을 벌지, 어떤 직업이 나에게 맞을지 이런 것들이요. 사람들이 계속 점을 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핫 텁 타임머신>이나 <페이첵> 같은 영화들이 솔직합니다. "과거에 남기로 했으니 구글 만들면 돈방석에 오를 거야. 그리고 야후 주식도 좀 사놔." 이 얼마나 쿨하고 현실적인 충고인가요. (물론 요즘 같으면 야후 주식보다는 애플 주식을 사라고 했겠죠.) <페이첵>에서 벤 애플렉은 미리 알게 된 로또복권 번호로 한몫 챙깁니다. 이런 소득은 타임머신 개발자에 대한 일종의 인센티브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론 드라마나 영화가 그런 이야기만 하면 너무 경박해지고 더 큰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치게 되겠죠. 그래서 저는 타임머신을 다룬 이야기를 만든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무한히 찍어낼 수 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누군가 돈 버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큼 잃는 사람도 있는 곳이 자본주의입니다. 누군가 과거의 정보를 통해 주식이나 복권 등 불로소득을 얻을 때 반대편에서 손해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거죠. 오히려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통해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가난해진 사람쪽이 더 나을 지도 모릅니다. [나인]에서라면 그게 최진철 회장(정동환 분)이겠네요.
6. [나인]에서 인생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인물이 두 사람 있는데 바로 최진철과 박정우(전노민 분)입니다. 두 사람 모두 박선우의 의지에 따라 삶이 바뀝니다. 즉, "형을 살려야 돼"라고 생각하자 형이 살아났고, "당신의 부와 명예를 눈앞에서 빼앗아 버리겠어"라고 말하자 최진철의 부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무리 직업이 바뀌어도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 같은 것은 그대로인 듯 보였습니다. 결국 선택은 인물에게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최진철은 의료기 업체를 그모양으로 놔두기보다는 한 번 마음 먹는다면 사업을 확장할 것 같고, 박정우는 의료봉사를 하면서도 과거에 갇혀 여전히 괴로워할 것 같습니다. 타고난 성향과 사주를 바꾸지 않는 한 인생에서 인간의 선택은 몇 번의 신호등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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