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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스크린을 싹쓸이 해 흥행질주를 할 땐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한 마디로 '깜냥이 안 되는 영화'가 흥행이 잘 되는 것은 거의 모든 멀티플렉스에서 이 영화만 상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도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 기름을 더했지만 적어도 이번엔 영화 자체의 자격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란이 없어 보인다.


<설국열차>가 '마스터' 봉준호의 범작이라면 <더 테러 라이브>는 '신인' 김병우의 화끈한 데뷔작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두 영화 모두 수작이다. 비록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설국열차>가 거둔 성과나 <더 테러 라이브>의 야심마저 폄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영화 모두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고, 좁은 공간 속에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 스릴러 영화인데, 국제시장을 겨냥한 <설국열차>가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라면 <더 테러 라이브>는 한국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직설적이다. 전자가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블랙코미디라면, 후자는 바늘을 꽂으면 심장까지 약효가 직행하는 피하주사처럼 직접적이다. 엔딩은 둘다 뜻밖인데 <설국열차>는 은유적으로 새 시대를 맞고, <더 테러 라이브>는 '그들'을 향해 강력하게 한 방 먹인다.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영화가 갖는 무게에 있다. 한 마디로 두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내 공기가 전혀 다르다. <설국열차>가 작은 가벼움에도 무게를 달아 묵직하게 보이도록 만든 영화라면, <더 테러 라이브>는 가벼움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 영화다. 가볍다고 철학이 부재한 것이 아니듯 무겁다고 마냥 진중한 것도 아니다. <설국열차>를 좋아하는 관객은 이 영화가 주는 인류 보편적인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도달하는 잘 세공된 기술에 점수를 준다. 반면 <더 테러 라이브>의 팬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하게 내달리는 팽팽한 긴장감과 그 깃털같은 가벼움에 반한다. 그러나 두 영화의 한계 모두 명확하다. <설국열차>는 보편적이어서 새롭지 않아 보이고, <더 테러 라이브>는 장르적 쾌감에 도취돼 스토리를 충분히 설득해내지 못한다.




인류의 축소판 거대한 우화 <설국열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한다는 목적으로 CW-7 이라는 냉각제가 살포된 후 지구엔 새로운 빙하기가 닥친다. 올해 출간된 [미래전쟁]이라는 책에서 기자 출신인 안드레아스 링케와 크리스티안 슈베게를이 가상 시나리오 중 첫 번째로 제시했던 '냉각전쟁'과 비슷한 아이디어가 영화로 만들어진 셈이다. 이 책에서 두 저자는 중국이 서구의 산업화가 초래한 지구온난화에 맞서 고도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대기권에 냉각제를 살포해 지구의 기온을 낮추려 한다는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설국열차>의 극단적인 미래가 전혀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니라는 것의 증명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의 원작은 자크 로브, 뱅자맹 르그랑의 동명 프랑스 만화다. 이 SF 만화는 냉각기가 닥친 이유를 냉전시대의 경쟁으로 설정했었는데 봉준호 감독은 이를 현 시대에 좀더 설득력 있는 지구온난화로 바꾸었다.

인류가 멸망한 지구엔 현대판 노아의 방주인 윌포드 열차에 올라 탄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지구의 모든 대륙을 1년에 한 바퀴씩 도는 그 기차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기차 안에서 코스모폴리스가 실현된 것 같지만 실상은 끔찍하다. 엔진칸부터 꼬리칸까지 어느 칸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이 영화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구를 도는 기차를 인류 전체로 보고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려는 것이다. 매순간 전진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이 시스템은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인간의 권력투쟁 역사일 수도 있고, 혹은 한 개인의 인간사일 수도 있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했다는 이유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17년 간 두 번의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식당칸에도 이르지 못하고 진압당했다. 그리고 이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가 세 번째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 영화는 그가 한 칸씩 전진하며 엔진칸에서 기차의 설계자인 윌포드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커티스는 그동안 역사에서 영웅으로 그려진 적 없던 핍박받는 민중을 대변하는 존재이기에 선동하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시스템에 분노하면서도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혁명의 와중에도 유희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도끼를 들고 싸우던 사람들은 "해피 뉴 이어!"라며 새해를 함께 축하하고, 혁명의 와중에도 식당에서 스시를 먹고, 아이를 교육시키고, 파티를 벌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권력욕이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사이에도 누군가는 문화를 만들고 누군가는 교육제도를 만들고 누군가는 유희를 즐긴다. 영화에서는 이를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대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참 다층적인 말이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사회 속 '계급'과 통한다. 영화에서는 꼬리칸부터 엔진칸까지 수직적으로 도식화해놓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신분 상승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문을 열 수 있는 자는 두 사람 뿐인데, 한 명은 기차의 설계자인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 그리고 또 한 명은 감옥칸에 타고 있는 남궁민수(송강호 분)다. 절대자와 죄수가 결국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 아이러니는 꼬리칸의 영웅 길리엄(존 허트 분)과 윌포드가 친구였다는 반전 만큼이나 통렬하게 느껴진다.

기차는 지구라는 큰 원형의 레일을 1년에 한 바퀴씩 돈다. 머리가 결국 꼬리를 좇는 형상이 되는 '뫼비우스 띠' 같은 역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이미지에 영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계급을 뚫고 이동하는 사람을 우리는 혁명가라 부른다. 그러나 결국 혁명가도 이에 적응하면 또다른 기득권이 된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돼 왔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고, 권력자는 유권자를 필요로 한다. 결국 혁명은 세상의 질서를 재편하는 또다른 장치에 불과하다. 가진 자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못가진 자들을 관리해야 하는데 그 방식은 전쟁을 개발하거나 혁명을 고안하는 것이다. 쑹훙빙의 [화폐전쟁]이나 피터 조셉의 다큐멘터리 <시대정신>을 통해 익숙한 메시지이지만 봉준호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바로 열차를 탈선시키는 것이다.


남궁민수는 영화의 후반부에 자신이 왜 크로놀 중독자처럼 행세했는지를 밝힌다. 산업폐기물인 크로놀을 폭탄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진정한 혁명은 엔진칸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차를 세우는 것 아니냐고. 혁명은 이 칸에서 다른 칸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열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이를 정치적으로 읽으면 기존 정당에 반기를 든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철학으로 보면 헤겔의 법철학과 마르크스를 넘어 들뢰즈가 말했던 '탈주'의 개념의 현현이다.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급진적인 주제다.

결국 엔진실에 도착한 커티스는 절대자를 만난다. 이 장면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의 커츠를 떠오르게 하고, 워쇼스키의 <매트릭스>의 아키텍트를 떠오르게도 하는데 한편으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피터 위어의 <트루먼쇼>의 PD 크리스토프와도 겹친다. 공교롭게도 <트루먼쇼>의 크리스토프 역시 에드 해리스가 연기했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를 드러내는 윌포드의 지나치게 설명적인 연설이 위 걸작들 만큼의 울림을 주었는지는 의문이다. 허무의 심연에 다가가려 했지만 피상적으로 변죽만 울리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설국열차>는 규모와 다국적 제작방식 등의 성과 만큼이나 한계 역시 명확한 영화다. 관객들의 호불호는 여기에서 갈린다. 상징적인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한 방식이 너무나 설교적이고 명징하다는 것.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전진하는 배경이나 목적이 뚜렷하지 않아 어떤 등장인물에도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는 것. 또 전반적인 영화의 톤이 무거워서 가볍게 즐기기 쉽지 않다는 것. 꼬리칸에 탄 사람들의 절망은 결국 어떤 식으로도 해결되지 못했고 신비한 아이 요나(고아성 분)와 엔진실의 기계 부속품으로 사용됐던 한 남자 아이만 탈출해 살아남는다.

트레인베이비로 태어나 한 번도 땅을 밟아 본 적 없는 요나는 공교롭게도 성경에서 신에게 대항하다가 배가 폭풍우에 시달리자 바다에 뛰어들어 큰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 탈출한 선지자와 이름이 같다. 그 아이가 홀로 땅을 밟는 장면은 기차라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탈출해 신에게 대항하는 의미로서 매우 상징적이다. 그러나 이런 상징은 관객이 영화를 곱씹다가 불현듯 눈치챌 정도로 사용될 때에만 효과적일 것이다. 직접적인 상징은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설국열차>의 만듦새가 빼어남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세계에 동화되기 힘든 이유다.



질주하는 시한폭탄 <더 테러 라이브>


한때 잘나가던 TV 뉴스 앵커였던 윤영화(하정우 분)는 금품수수 의혹으로 좌천돼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다. 어느날 그의 프로그램에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마포대교를 폭발할 거라고 말한다. 장난전화라고 생각한 그는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는다. 그러나 잠시 후 실제로 마포대교가 폭발한다. 그 순간 윤영화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은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 테러범과의 전화연결을 생방송으로 내보내면 하루아침에 스타 앵커로 복귀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를 좌천시켰던 방송국 보도국장(이경영 분)과 다시 손을 잡는다. 테러범의 목소리를 TV로 전국에 생중계하기로 한 것이다.

<설국열차>처럼 <더 테러 라이브>도 직선의 영화다. 직선으로 뻗어가는 이야기 속에 시청률 지상주의, 죽어간 노동자의 비애, 권위적인 정부, 여론조작 등 우리 사회의 모순들이 고스란히 치부를 드러낸다. 재작년 [정의란 무엇인가?]의 돌풍에 힘입어 정의와 사회 병폐를 다룬 영화들인 <도가니> <부러진 화살> <26년> <화차> <피에타> 등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장르적인 재미까지 추구하는 영화로 가상의 테러를 마치 실제상황인 것처럼 만든 신인감독 김병우의 솜씨가 대단하다.

한 번 추진력을 얻은 이야기는 쉬는 법 없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돌진한다. 때론 개연성에 의문이 드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윤영화 앵커가 왜 갑자기 변하는지, 대테러팀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모두 대피한 건물에서 방송이 계속될 수 있는지 등이다. 그러나 이런 흠집들이 영화의 쾌감을 덮지는 못한다. 짧은 인서트컷과 흔들리는 카메라와 빠른 편집은 이 모든 것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는 엔딩에서 펑! 한 방에 터뜨린다. 신인감독만이 할 수 있는 패기 있는 엔딩이며 근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파격적인 엔딩이다.

스릴러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범인을 언제 노출시키는가다. 범인이 누구인지 마지막까지 궁금하게 만들면 미스터리가 되고,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면 서스펜스 스릴러가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영화는 초반에 테러범의 정체를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화를 건 테러범은 자신을 수십년간 다리를 짓던 일용직 노동자라고 소개한다. 테러범의 정체를 알려줌으로서 관객이 범인보다는 그가 왜 테러를 저질렀는지 그 이유에 더 집중하게 한다. 사회의 모순을 들추고 최대한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서 극악무도한 테러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관객을 향해 설득하려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테러범의 목적이 분명하게 전달되고 더이상 그 방향으로는 이야기가 추진력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테러범이 밝힌 이름이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경찰에 의해 확인되면서 테러범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증폭된다. 좋은 스토리텔링의 조건이 듣는 이를 궁금해서 못 견디게 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시간대별 전략은 참 영리하다.


테러범과의 통화가 TV로 생방송되는 중에 앵커의 인이어를 통해 PD와 경찰 대테러팀장, 보도국장의 목소리가 시도때도 없이 스크린에 끼어들면서 여러 목소리 만으로 긴박감이 절정에 달한다. 영화의 무대는 방송을 하고 있는 라디오 스튜디오의 좁은 공간이 전부지만 창 밖으로 다리가 폭발하는 모습과 TV 화면 속 고립된 다리가 연결되면서, 즉 현실과 TV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실제상황이라는 느낌이 배가된다. 여기에 그저 모니터인줄 알았던 또다른 채널에서 다른 앵커가 윤영화 앵커에게 전화를 걸어 생방송 중에 뇌물수수 의혹을 추궁하는 장면은 방송이 살아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준 멋진 장면이다.

이 모든 상황을 홀로 고군분투하며 냉혈한 출세주의자, 생방송 중 긴장한 앵커, 언론인의 사명을 잊었냐는 말에 고심하는 방송인, 그저 살아남고 싶은 평범한 인간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윤영화 앵커 역의 하정우는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장르적 쾌감에 치중한 나머지 대사들이나 구성에서 좀더 묵직한 메시지를 끌어내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신인감독의 한계라고 할까. 올리버 스톤의 <내츄럴 본 킬러>에도 시청률에 혈안이 된 TV 프로그램 진행자가 감옥에서 살인범의 인터뷰를 생중계하는 비슷한 장면이 있는데 그 영화는 살인범이 진행자를 죽이는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미디어의 위험성에 대한 뜨거운 담론을 만들어냈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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