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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는 바람 부는 보리밭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수차례 등장한다. 그 장면들은 참 근사하다. 마치 <배리 린든>의 결투 장면처럼 위엄이 느껴지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어메리카> 같은 갱스터영화처럼 우아하다. 그런데 배경이 독립투쟁이다보니 위 영화들에서 느껴진 우아한 위엄 보다는 촌스러울만큼 무뚝뚝하고 애잔한 인간적인 감성에 더 가깝다. 마치 조선의 독립투쟁을 연상시키며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베레모 혹은 패도라를 쓰고 바바리를 입고 장총을 멘 군인들이 흐릿한 화면 속에서 총을 꺼낸다. 그리고 총이 사정없이 불을 뿜는다. 그 총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갖고 뽑는 총도 아니고 저들을 꼭 죽여야만 해서 꺼내는 총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총이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그들의 신념이 살인을 정당화한다. 그 시절 그들은 이념 아래 뭉쳤고 절박했다.


데미언과 테디 오도너번 두 형제. 데미언은 의사였고 테디는 혁명가였다. 데미언은 친구가 영국군에 의해 죽자 형이 이끄는 IRA에 가담한다.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던 그들은 영국군에게 무기를 빼앗는 등 성과를 올리지만 내부 밀고자 때문에 붙잡힌다. 보초병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 뒤 데미안에게 밀고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밀고자는 데미언이 막내 동생처럼 아끼던 크리스. 데미언은 크리스를 죽일 수 있을까?


- 크리스는 어리잖아. 그는 살려두자.

- 크리스는 배신자야. 그리고 이건 명령이야. 언제부터 크리스랑 알고 지냈지?

- 크리스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어.

- ... 할 수 있겠어?

- 아일랜드가 제발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군.


데미언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크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크리스의 엄마에게 전해주고 온 데미안은 연인 시네이드에게 담담하게 고백한다.


- 크리스의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어. 시신을 꼭 보고 싶다고 하더군.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나를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하셨어.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아끼던 동생을 처형할 만큼 이 전쟁이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질까? 더블린 봉기의 주역 제임스 코널리가 꿈꾸던 세상은 과연 올 것인가? 그러나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꿈꾸는 자가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는 자다.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휴전이 이루어지고 1921년 둘 사이에 맺어진 조약으로 아일랜드가 양분되면서 마이클 콜린스는 IRA의 영웅에서 배신자로 추락한다. 그리고 IRA에서 함께 싸우던 두 형제도 극단으로 나뉜다. 마이클 콜린스를 지지하는 형은 현실주의자가 되어 있고, 동생은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일랜드 내전이다.


독립 아일랜드의 첫번째 법정. 여성 재판관은 자본가에게 그가 착취한 돈을 채무자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한다. 자본가는 재판을 인정할 수 없다며 화를 내고 나가버린다. 그때 형은 자본가의 편에 선다. 그가 무기를 살 돈을 대준다는 게 이유다.


- 그는 우리에게 돈을 줘. 그 돈으로 무기를 산다고. 우리는 그 돈이 필요해.

- 여긴 법정이야. 독립 아일랜드 법정이 처음으로 내린 판결이었어. 넌 그걸 무시했어. 우리가 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싸운거지?

- 생각해봐. 우리 목표는 독립이야. 그것만을 생각하자고. 지금은 그가 필요해.

- 넌 우리가 싸우는 영국이랑 똑같아. 제대로 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지 않을 거면 싸울 필요도 없지. 넌 나를 무시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세운 이 법정은 존중해야돼.


그때 독립군에서 함께 싸웠던 한 대원이 일어서서 말한다.

-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물들에게도 있어. 모두가 함께 이 땅의 부를 소유한다.
이걸 원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기득권의 억양과 영국 국기만을 얻게 될 뿐이야.


독립운동을 위해 싸워온 두 형제 데미언과 테디의 목표는 오직 영국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작 무엇을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엇에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다." 데미언의 극중 대사다. 이 영화는 IRA 독립투쟁을 다룬 영화이지만, 이 지점에 들어서면 세상의 모든 전쟁과 이념을 등에 업고 싸우는 혁명가들에게 보편적으로 통하는 일종의 우화가 된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이상의 실현을 위해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늘 낮은 곳에서, 그리고 왼쪽에서, 투쟁하듯 영화를 만들어온 켄 로치 감독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결국 타협주의자가 이상주의자를 죽이는 현실을 엔딩으로 선사한다. 두 형제의 비극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묻혀버렸고 아일랜드는 여전히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된 채 남아 있다. 2006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Robert Dwyer Joyce (1830-1883)


그녀를 향한 오래된 사랑
나의 새로운 사랑은 아일랜드를 생각하네
산골짜기의 미풍이 금빛 보리를 흔들 때
분노에 찬 말들로 우리를 묶은 인연을 끊기는 힘들었지
그러나 우리를 묶은 침략의 족쇄는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네 그래서 난 말했지
이른 새벽 내가 찾은 산골짜기 그곳으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황금빛 보리를 흔들어 놓았네

The old for her
The new that made me think on Ireland dearly
‘Twas hard for mournful words to frame
to break the ties that bound us,
ah but harder still to bear the shame
of foreign chains around us.
And so I said : the mountain glen
I’ll seek at morning early
And join the brave united men
While soft winds shake the barley
And shook the golden barley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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