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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목숨을 건 두 남자의 브로맨스를 그린 영화 '포드 V 페라리'가 높은 좌석판매율과 실관람객들의 호평 속에 장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화려한 레이싱 영상으로 승부하는 기존 레이싱 영화들과 달리 자동차에 대한 꼼꼼한 장인정신, 두 남자의 우정, 땀을 배신하지 않는 승부, 그리고 장거리 경주를 인생에 빗댄 묘사로 영화는 레이싱 팬뿐만 아니라 차에 큰 관심이 없는 관객도 만족시킨다.
미국에서도 평단과 관객 호평이 잇따르고 있어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편집상을 비롯한 여러 부문 후보에 오를 것이 유력해 보인다.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
영화의 원작은 AJ 베임 작가의 논픽션 'Go Like Hell'(영화 속에서 데이토나 경기 도중 캐롤 셸비가 켄 마일스에게 들어보이는 푯말에 쓰인 문구로 등장한다)으로 영화 속 인물과 사건들은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부분도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를 살펴봤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 포드를 먼저 찾아간 캐롤 셸비
맷 데이먼이 연기한 캐롤 셸비는 1923년 텍사스주 리스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조종사였고, 전쟁이 끝난 뒤엔 닭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1950년대 레이싱에 뛰어든 그는 1956년과 1957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매거진에서 '올해의 드라이버'로 선정될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카레이서로서 셸비의 전성기는 1959년이었다. 그해 셸비는 영국 아스톤 마틴 소속으로 르망24에 참가해 페라리를 꺾고 우승했다. 이때 로이 살바도리와 한 팀이었는데 살바도리는 셸비가 포드와 계약해 새로운 레이싱카를 개발할 때 켄 마일스와 함께 테스트 드라이버 역할을 해주었다.
캐롤 셸비와 맷 데이먼
셸비에겐 고질적인 심장병이 있어서 니트로글리세린 알약을 꾸준히 먹어야 했다. 결국 그는 1962년 은퇴하고 자동차 설계자로 새 인생을 시작한다. 그가 설립한 셸비 아메리칸은 특별한 스포츠카를 만드는 독립적인 자동차 제조사였는데 영국의 AC쿠페를 수입해 포드 엔진으로 피팅해 만든 AC코브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영화에서처럼 그는 카리스마 강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최전선에서 반대자들을 무력화시키는 기업가"로 기억했다.
포드와 협업을 시작한 것은 포드의 페라리 인수가 무산된 1963년부터였다. 영화 속에선 포드 부사장 리 아이어코카가 셸비를 찾아와 백지 수표를 내밀며 레이싱 팀을 의뢰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셸비가 디트로이트의 아이어오카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전 PT 리허설까지 했고 요구할 금액도 미리 계산했다. 당시 셸비가 포드에 레이싱팀을 만들기 위해 요구한 금액은 2만 5000달러였다.
1962년 셸비 아메리칸을 설립하고 영국에서 수입해온 AC쿠페를 테스트하는 캐롤 셸비
셸비는 처음엔 아스톤 마틴에서 함께 일한 팀원들을 불렀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1964년과 1965년 르망24에서 연속으로 패배했다. 이때 영화와 달리 켄 마일스도 패배한 팀의 드라이버였다. 포드 엔지니어들과 협업을 늘린 그는 GT40 MKII을 개발해 출전한 1966년 마침내 르망24를 제패했다.
셸비와 포드의 협업은 1969년 끝났다. 자동차에 대한 다른 관점과 경제적인 문제가 이유였다. 이후 셸비는 크라이슬러의 닷지와 함께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1970년대 들어 셸비는 새로운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사파리, 칠리 생산, 토지 개발 등 다방면으로 확장했다.
2011년 캐롤 셸비와 에드셀 포드 2세
평생 심장병을 달고 살던 셸비는 1990년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심장 수술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자선사업도 펼쳤다. 이때 포드와의 협업도 재개해 그가 죽을 때까지 파트너사 관계를 유지했다. 셸비는 2012년 5월 10일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8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2. 탱크를 몰던 켄 마일스
켄 마일스는 1918년 영국 서튼 콜드필드에서 태어났다. 크리스찬 베일이 버밍엄 액센트를 살려 연기한다. 그는 마일스 연기를 위해 20kg을 감량했다.
마일스는 10대부터 웨슬리 모터스의 견습생으로 전통적인 훈련과정을 밟고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으로 참전했다. 7년 동안 그는 부사관으로 탱크를 몰았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탱크 운전사로 참가해 전쟁 영웅으로 제대했다.
켄 마일스와 크리스찬 베일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직업을 찾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영화에서처럼 그는 고집 세고 터프한 남자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용하기를 꺼렸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에 익숙했던 그는 할리우드에서 ‘켄 마일스 튜닝 숍’을 열었지만 사업 수완은 좋지 않았다. 1963년 세금 미납으로 국세청이 상점을 걸어잠그기도 했다. 반면 카레이서로서는 40대에도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마일스의 인생은 셸비를 만나면서 바뀐다. 그는 셸비 팀에 합류해 운전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링도 도왔다. 마일스는 1966년 데이토나24에 포드 GT40를 몰고 출전해 우승했고, 그해 르망24에선 GT40 MKII 모델로 출전해 논란 속 준우승을 이뤘다.
그해 8월 16일 마일스는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레이스웨이에서 포드의 신차 J Car 테스트 드라이브를 하던 도중 엔진 폭발로 사망했다. 이 차는 이듬해 르망24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당시 '데저트 선'의 부고 기사에 따르면 사고 원인은 기계 결함이었다. 이 사고 이후 규제가 강화돼 자동차 회사들은 안전장치 부착을 의무화했다.
1966년 켄 마일스와 캐롤 셸비
3. 켄 마일스의 도둑맞은 우승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페라리가 경기를 포기한 이후 르망24 레이스의 1,2,3위는 모두 포드의 차지가 된다. 마케팅 담당 부회장 레오 비비는 포드 2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포드 자동차 3대가 나란히 질주하며 대회를 마치는 모습이 사진 찍히면 홍보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드 2세는 이 제안을 승낙한다.
하지만 여기엔 반전이 숨어 있었다. 포드는 굉장한 PR 효과를 얻었지만 마일스는 승리를 도둑맞았다. 르망24 계시원은 마일스 다음으로 들어온 브루스 맥클라렌의 GT40가 레이스를 더 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우승이라고 판정했다. 마일스는 가장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우승자가 되지 못했다. 마일스는 데이토나와 세브링에서 우승한 2관왕이었지만 3관왕이 될 기회를 박탈당했다.
1966년 르망24에서 포드 3대가 나란히 질주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지만 한 가지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영화에선 셸비가 비비의 제안에 분개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셸비는 비비의 제안에 완전히 동의했다. 마일스 역시 그 제안을 큰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우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부분을 과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순위가 뒤바뀔지 알지 못했다. 셸비와 마일스는 물론 비비 역시 순위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나중에 밝혔다.
몇 달 후 마일스가 갑자기 사고로 죽은 뒤 셸비는 한 인터뷰에서 이 결정을 후회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때 비비와 포드 2세의 제안에 동의한 것에 대해 마일스에게 영원히 미안해 할 것이다. 당시 켄은 한바퀴 반이나 앞서 있었다. 이 사건으로 켄은 상심이 컸고 그해 8월 우리는 진정한 엔지니어를 잃었다. 그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다."
1966년 르망24는 켄 마일스가 참가한 마지막 대회로 남았다.
4. 논란을 일으킨 부회장 레오 비비
조쉬 루카스가 연기한 포드 부회장 레오 비비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떠맡은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켄 마일스를 싫어하게 되면서 셸비 팀과 마찰을 빚는다. 셸비는 그를 사무실 안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비비의 존재감으로 인해 영화는 포드 대 페라리의 대결에서 포드 대 포드의 대결로 바뀌며 이중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실제 레오 비비는 2001년 사망했는데 생전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영화 속 비비의 모습이 실제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아니라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비가 레이싱팀을 맡았을 당시 셸비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켰고, 마일스를 신뢰하지 않았고, 포드 3대를 나란히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사실이다.
레오 비비와 조쉬 루카스
헨리 포드 2세는 포드 레이싱팀을 만들면서 비비를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이때 비비에겐 레이싱과 관련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포드 2세는 비비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비비와 포드 2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서 함께 복무한 전우이자 절친이었다.
비비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에드 클루스는 이렇게 말했다.
“레오는 포드 2세가 어떤 일을 알고 싶어할 때마다 찾는 사람이었다. 레오는 포드 2세를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 헨리 포드 2세와 레오 비비
해결사 비비의 능력을 살펴보려면 1950년대로 돌아가야 한다. 헝가리에서 혁명이 발발해 피난 온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포드 2세는 비비를 미국 정부로 파견해 피난민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게 했다. 비비는 뉴저지주의 캠프 킬머에 수만 명을 수용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60년대 초엔 대규모 쿠바 난민들이 플로리다에 정착하도록 돕는 일도 했다.
포드 2세가 레이싱팀을 꾸려 페라리를 꺾기로 결심했을 때 비비를 책임자로 앉힌 것은 이런 비비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포드 2세는 비비에게 백지수표를 건네면서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기는 게 좋을거야."
결과적으로 비비의 포드 레이싱팀은 르망24에서 우승했다. 그는 마일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차 3대를 동시에 들어오게 하는 결정이 마일스의 우승을 박탈시킬 줄은 몰랐다고 나중에 밝혔다. 그는 마일스가 2위가 됐다는 걸 알게 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건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어요."
레오 비비
작가 레오 레빈이 1968년에 쓴 책 'Ford: The Dust and the Glory'에 따르면 비비는 포드가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어 만든 우승의 영광을 차 한 대가 독차지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브루스 맥클라렌과 크리스 아몬은 회사의 명령을 따랐지만 켄 마일스는 매번 반항했고 이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비비와 마일스의 관계에서 영화가 실제 사건과 명백하게 다르게 묘사한 부분도 있다. 영화에선 1965년 르망24 대회에 비비가 반대해 마일스가 아예 출전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마일스가 참가했다가 기어박스 문제로 페라리에게 졌다.
비비는 1972년 포드를 떠났고, 이후 글래스보로 비즈니스 스쿨 부교수로 옮겨 학자의 길을 걸었다.
헨리 포드 2세와 트레이시 레츠
5. 헨리 포드 2세와 켄 마일스는 1살 차이
헨리 포드 2세는 1917년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출생으로 켄 마일스보다 한 살 많다. 영화에서 트레이시 레츠가 연기했는데 특유의 위압감으로 인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 모두 40대 후반의 나이였다.
헨리 포드 2세는 창업자 헨리 포드의 손자다. 아버지 에드셀 포드는 헨리 포드의 외동아들이었고, 헨리 포드 2세의 아들이 에드셀 포드 2세가 된다.
헨리 포드 2세 뒤로 에드셀 포드와 헨리 포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포드 2세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포드 회장이던 아버지 에드셀 포드가 1943년 암으로 사망할 때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다.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헨리 포드가 다시 경영권을 회수했고, 포드 2세는 해군을 제대해 회사 경영팀에서 2년간 경영수업을 받은 뒤 1945년 회사를 물려받았다. 헨리 포드는 1947년 타계했고 이후 포드 2세는 회사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1963년 포드 2세는 페라리를 인수해 모터스포츠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고 르망24에도 참가하려 했다. 페라리는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르망24를 6회 연속 우승한 절대강자였다. 하지만 협상은 페라리 레이싱 팀에 대한 권한을 누가 가질 것이냐를 놓고 갈등을 빚다가 결국 결렬됐다.
페라리 인수에 실패한 뒤 포드 2세는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좋아.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겠어.”
하지만 영화에선 더 격하게 말한다.
“그 뚱뚱한 이탈리아놈을 묻어버리겠어.”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헨리 포드 2세
영화 속에서 페라리가 고용한 사진사가 포드와 페라리가 만나는 사진을 찍어 경쟁사인 피아트에 갖다 주고 피아트가 더 큰 베팅을 하게 만들지만 이는 픽션이다. 피아트는 1968년에야 페라리를 인수했다.
영화 속에서 엔초 페라리는 포드 부사장 리 아이어코카를 향해 욕설에 가까운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다. 실제로도 그랬다. 베임의 책에 따르면 페라리의 변호사 프랑코 고치는 당시 페라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돼지 같은 보스를 위해 크고 못난 공장에서 크고 못난 차나 만드는 쓸모없는 창녀 자식들!”
그는 페라리의 욕설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고 무척 길었다고 회고했다.
1966년 르망24 대회 당시 영화 속에선 페라리와 포드 2세가 모두 현장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당시 페라리는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헨리 포드 2세는 경기장에 있었다.
리 아이어코카와 존 번달
6. 자동차 업계의 전설 리 아이어코카
존 번달이 능청스럽게 연기한 리 아이어코카는 훗날 자동차 역사에서 전설적인 경영자가 된다.
아이어코카는 1946년 포드의 훈련생으로 입사했다가 1970년 대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67년 포드 머스탱을 성공시키면서 위대한 세일즈맨으로 칭송받았다. 포드 2세는 1978년 아이어코카를 돌연 해고했는데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이어코카는 이후 부도 위기에 처한 크라이슬러 CEO가 되어 회사를 미국 자동차업계 톱3로 올려놓으며 완벽하게 부활시킨 뒤 1992년 은퇴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2009년 부도를 맞았는데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주체가 이탈리아 피아트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때 크라이슬러가 도산하면서 아이어코카는 은퇴연금 일부를 더 이상 수령하지 못하게 됐다. 파킨슨병을 앓던 그는 2019년 7월 2일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66년 르망24 레이스 시작 직전 모습
7. 세계서 가장 오래된 장거리 레이스, 르망24
1923년에 첫 개최된 르망24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거리 레이싱 대회다. 프랑스 북서부 인구 14만명의 작은 도시 르망에서 매년 6월 개최되는데 인니아나폴리스500, 모나코 그랑프리와 더불어 모터스포츠의 ‘트리플 크라운’으로 불린다.
르망24는 정해진 거리를 누가 빨리 달리느냐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가 아니라 24시간 동안 더 오랜 거리를 달린 차가 우승하는 경기다. 따라서 피니시 라인이 따로 없다. 누가 더 빠르면서도 고장나지 않고 오래 견디는 차를 만드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다. 르망24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미국 데이토나, 독일 뉘르부르크링 등 비슷한 형식의 24시간 대회가 생겨났다.
독일의 포르쉐가 19회 우승으로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포드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번 우승했다.
영화 속 켄 마일스와 캐롤 셸비
PS 1) 당초 캐스팅은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였다. 제작이 지연되고 감독이 제임스 맨골드로 확정되면서 캐스팅도 바뀌었다.
PS 2) 포드는 1966년에 이어 1967년, 1968년, 1969년에도 르망24에서 우승했다. 포드사의 지원은 1967년 우승 이후 끊겼고 1968년과 1969년은 개인 참가자의 우승이다.
PS 3) 경주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되지 않은 100% 리얼 영상이다. 수많은 관중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만 제한적으로 CG가 쓰였다.
PS 4) 영화 속 차는 당시 실제로 만들어진 차는 아니다. (당시 실제 차량은 한정된 수량만 남아 있고 너무 비싸다!) 셸비 컬렉터 윌리암 디어리로부터 실제 차를 빌려와 카피해 새로 만든 것이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2/27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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