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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엔터테인먼트는 꿈의 프로젝트 <어벤져스>를 만들기 위해 당시까지 영화화되고 있지 않던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들을 부랴부랴 스크린으로 옮겼다. 바로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 천둥의 신>이 2011년에 새롭게 등장한 슈퍼 히어로들이다. 호크아이와 블랙 위도우는 단독 스토리가 없어서인지 마블의 다른 영화 속에 잠깐씩 나오는 것으로 대체했다. <토르>에 호크아이가 아주 잠깐 등장하고, <아이언맨 2>에서는 블랙 위도우가 비중 있게 나오는 식이다.



<어벤져스>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지금 돌아보면, 마블의 모험적인 시도는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람들은 마블이라는 브랜드를 더 잘 알게 됐고, 마블의 캐릭터들도 더 많은 팬을 확보했다. 그렇게 <어벤져스>는 헐리우드의 슈퍼히어로 영화 붐을 클라이막스로 이끌고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2011년에 만들어진 두 영화,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 천둥의 신>은 비교적 쉽게 잊혀져버렸다.


여기서 잊혀졌다는 것은 슈퍼히어로의 팬들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잊혀졌다는 말이다. <아이언맨>이나 <엑스맨>처럼 메가히트를 기록하지 못한 두 영화 대신 <어벤져스>가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다만 마니아들에게 두 영화는 나중에라도 꼭 찾아봐야 하는 영화로 남게 됐다. 특히 토르와 로키라는 두 멋진 캐릭터가 등장하는 <토르: 천둥의 신>은 <어벤져스>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꼭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보인다.



미국 만화계를 양분하는 두 거대 기업이 있다. 바로 DC코믹스와 마블 코믹스이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으로 대표되는 DC코믹스와 헐크,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토르 등의 캐릭터를 갖고 있는 마블 코믹스. DC의 캐릭터가 좀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반면 마블의 캐릭터들은 화려함에 중점을 둔다. DC의 캐릭터들은 늘 인간과 함께 하는 사회에서 정의와 책임감에 고뇌하지만 마블의 세상에서 인간은 부차적인 존재로 그려질 때가 더 많다.


마블 캐릭터의 계보를 잇고 있는 <토르: 천둥의 신>의 경우에도 토르가 다른 슈퍼히어로처럼 인간 여자와 사랑을 나누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판타지로 느껴진다. 그대신 묠니르라는 망치를 통한 강력한 힘이나 우주를 관통하는 멋진 다리를 오가는 모습을 구현한 화려한 이미지가 더 기억에 남는다.



'토르'는 원래 북유럽 고대 신화에서 천둥, 번개, 바람, 비의 신이다. 절대적인 신이었던 오딘의 아들이자 강력한 힘의 원천으로 영어에서는 토르의 날을 기려 '목요일(Thursday)'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 아더왕처럼 토르는 신비의 망치 묠니르를 가질 때 막강한 힘을 얻는다. 영화 속에서 토르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거의 불사의 존재인데 마치 슈퍼맨과 헐크를 섞어놓은 것 같다. 빨간 망토를 입고 팔을 앞으로 뻗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슈퍼맨을 연상시키고 망치를 휘두르는 파워는 헐크를 떠오르게 한다. 다만 슈퍼맨보다 근육질이고 헐크보다 섹시하다.


마블 캐릭터들의 아버지이자 현재에도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명예고문인 스탠 리는 토르를 처음 만들 때 헐크마저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파워의 슈퍼히어로를 원했고, 그 해답을 신화에서 찾았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처럼 낯익은 이름이 아닌,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낯설었던 북유럽 신화의 신이다. 기존의 슈퍼히어로가 외계인이거나 돌연변이, 약물 투여 혹은 동물 유전자 합성 등에 의해 생겨났다면 토르는 전혀 다르다. 과거부터 전해내려온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영화는 낯설지 않게 하기 위해 우주공간을 이용한다. 머나먼 행성에서 특수한 다리를 통해 날아온 훈남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 만화와 많이 다르다. 만화 원작은 자신의 신분을 모른 채 의대생으로 살아가던 도날드 블레이크가 어느날 노르웨이를 여행하던 중 외계인의 추격을 받게 되고 우연히 숨게 된 동굴에서 신비의 망치를 발견하면서 토르의 힘을 되찾게 되는 줄거리이다. 도날드가 사랑하는 제인 포스터는 간호사로 등장하는데 토르는 제인과 사랑을 나누는 한편 지구를 수호하는 슈퍼히어로로서의 삶을 병행한다.



영화의 감독인 케네스 브래너는 원작의 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바꾸었다. 사실 원작의 도날드 블레이크라는 인물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슈퍼맨>의 클라크 켄트를 연상시킨다. 캔자스의 클라크가 자신의 능력을 알면서도 숨겨야하는 존재였다면 도날드는 우연히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후에는 둘 모두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간다. 따라서 감독은 <슈퍼맨>과의 비교를 피하기 위해 도날드 블레이크라는 가짜 아이덴티티를 최소화하고 토르 그 자체의 매력에 더 집중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뉴멕시코에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겪는 좌충우돌에서 극적 재미를 전해주려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모든 능력을 빼앗긴 채 평범한 인간(?)으로 지구에 떨어졌지만 결코 비범함을 숨길 수 없는 캐릭터다. 지구에서 토르는 힘이 갖는 한계를 자각하고 무력이 아닌 균형 혹은 중용의 미덕을 배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묠니르의 힘을 되찾게 되면서 이 영화는 토르가 왕의 자격을 갖추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감독인 케네스 브래너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마릴린과 함께 한 일주일>에서 로렌스 올리비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케네스 브래너는 영국이 사랑하는 셰익스피어 전문가다. 그가 1996년에 만든 242분짜리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가장 원작 그대로 재현해낸 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영국에서 시대극을 주로 만들던 그가 미국에서 시대극이 아닌 영화를 찍은 것은 2007년의 소품 <추적>이 유일하다. 그러던 그가 대체 어떻게 헐리우드에서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감독이 될 수 있었을까?


마블이 지금까지 감독을 고른 방식을 살펴보면 이유를 대충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마블의 감독 선임에는 다소 모험적인 데가 있었다.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는 <이블 데드>로 명성을 얻은 이래 주로 B급 호러영화를 만들던 비주류였고, <헐크>의 이안은 중국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찍던 감독이었다. 마블은 아마도 감독의 다재다능한 면 보다는 한 가지 장점에 더 집중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케네스 브래너가 <토르: 천둥의 신>과 어울리는 부분은 오딘과 토르, 그리고 로키와의 관계가 갖는 문학적인 상상력일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의 욕망, 그리고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동생의 질투, 출생의 비밀로 인해 방황하는 로키의 심리 등은 마치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부자와 형제의 갈등이 우아하게 그려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완성된 영화는 그 정도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케네스 브래너는 벌여놓은 판을 수습하기에 급급해보일 정도로 이렇게 규모가 큰 영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화려하고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의 영화일수록 짧은 순간마다 영상이든 대사든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제인과 토르의 사랑 뿐인 것 같다. 토르가 어떤 계기로 변화하게 되었는지, 동생 로키가 어떤 고뇌를 갖고 있는지 등이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형제간의 갈등이 다소 피상적으로 느껴진다.


또 영화 초반에 전반적인 배경을 설명해주는데 그것이 전체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저 관계를 나열해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가령 오딘이 프로스트 자이언트에게 힘의 원천 캐스킷을 뺏어오고 그 전쟁 이후 그들은 휴전 상태에 돌입하는데 도대체 캐스킷이 무엇인지, 또 두 세계가 어떤 관계인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적으로는 안타깝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화려한 비주얼이다. <토르: 천둥의 신> 속 세상에는 아홉 개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아스가르드, 요튼하임, 그리고 지구가 그곳에 속하는 세계들이다. 이들을 잇는 무지개 다리로 토르와 그의 친구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을 카메라가 따라가면서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환상적이다. 그리고 아스가르드 왕국의 장엄한 붉은색과 요튼하임의 차가운 얼음 등도 근사하다. <가위손> <배트맨 리턴즈> 같은 팀 버튼 영화에 참여했던 프로덕션 디자이너 보 웰치와 <아바타>를 만들었던 레거시 이펙츠의 합작품이다. 또 문지기 헤임달의 무게감과 의상도 멋지다. 비록 <아이언 자이언트>의 로봇을 연상시키는 불을 뿜는 디스트로이어나 로마 시대를 연상케하는 아스가르드의 왕궁 내부처럼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신선한 비주얼을 보여준다.



나탈리 포트만, 안소니 홉킨스, 스텔란 스카스가드, 르네 루소 등 화려한 배역이 있지만 이 영화의 발견은 단연 크리스 헴스워스일 것이다. 191cm 장신의 근육질 호주배우인 그는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조연을 맡은 것이 거의 전부인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장차 마블을 이끌어갈 슈퍼히어로 중 한 명인 토르 역으로 캐스팅됐다. 하지만 육중한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존재감은 마치 <트로이>의 브래드 피트를 보는 듯 매력적이어서 모든 우려를 불식시킨다.


또 로키 역의 톰 히들스턴 역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영국 출신 배우였는데 이 영화에서 다혈질적 캐릭터인 토르의 정반대 편에서 날렵하고 고뇌에 가득찬 악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영화가 토르에 집중한 나머지 로키에 대한 설명에는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가령 로키가 갑자기 분신술을 사용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그저 눈요기거리에 그치고 만다. 마지막으로 출연 배우 중 일본의 아사노 타다노부가 있는데 일본 영화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높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거의 안습 수준의 출연이라 안타깝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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