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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46번 게이트에서 2018년 12월부터 살고 있는 콩고 출신 루렌도 씨 가족이 난민 심사에서 패소한 뒤 재심을 기다리고 있다는 기사의 댓글은 온정적인 사연과는 달리 악플 일색이다. 그가 가짜 난민이기에 한국에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뿌리깊은 민족주의의 발현일 수도 있고, 난민을 향한 문이 열리면 그렇잖아도 살림살이 팍팍한 현실에서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현실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지구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난민에도 ‘가짜’가 있으니 걸러야 한다는 말은 또다른 폭력처럼 느껴져 슬프지만(가난하고 핍박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유럽이든 미국이든 다들 문 걸어잠그는 시대에 왜 한국이 글로벌 ‘호구’가 되어야 하느냐는 말을 들으면 또 섣불리 판단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루렌도 씨 가족이 언제까지 인천공항에서 살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살기 위해 도망쳐왔다는 앙골라에 언제 평화가 찾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천공항에서 추방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또다른 공항을 전전해야 할 것이다.
어느 국가로도 입국하지 못하고 장기간 공항에서 살았던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란 태생의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 씨일 것이다. 그는 1977년 이란 팔레비 왕조 반대시위에 참가한 경력으로 인해 이란에서 추방당한 뒤 벨기에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아 머물렀는데 1988년 삶의 터전을 영국으로 옮기려던 중 프랑스 기차역에서 여권을 분실하는 바람에 런던으로 가지 못하고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발이 묶였다. 벨기에가 재입국을 거부해 그는 샤를드골 공항에서 살게 됐는데 그 기간이 무려 18년이나 된다.
2004년에 만들어진 영화 <터미널>은 나세리 씨가 쓴 자서전 [터미널 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영화는 한 남자가 공항에서 살아간다는 설정만 남기고 주인공의 출신지와 사연, 장소 등 거의 대부분을 바꿨다.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 출신으로 여권이 정지되는 바람에 뉴욕 JFK 공항에 장기 체류하게 된다. 환상적인 모험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아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는 빅터가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빅터는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낯선 동유럽인으로 그려지지만 당대 최고의 호감 배우 중 한 명인 톰 행크스가 연기한 덕분에 첫 등장부터 관객에게 굳건한 믿음을 준다. 빅터는 좌절하지 않고 공항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들고, 고임금 직업을 구하고, 스튜어디스와 근사한 데이트까지 하며 인생 반전을 이루어낸다.
지금 루렌도 씨가 겪고 있는 현실에 비하면 영화 속 빅터의 이야기는 판타지에 가깝다. 실제 인물인 나세리 씨는 벨기에가 난민 재심사 승인을 내주어도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공항 생활자로 주목받는 유명세에 만족하긴 했지만 그 역시 장기 노숙 생활에 익숙해져서일 뿐 빅터처럼 영웅이 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낭만적인 모습이 불편할 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루렌도 씨처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게 당연한데 빅터는 금세 영어를 터득하고 그 짧은 영어로 다수 사람들의 믿음까지 얻는 등 모든 게 수월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진무구한 판타지를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빅터라는 인물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낙천적인 마음과 착한 심성이 있다면 현실이 비루하더라도 누구나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설파한 프랭크 카프라식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메시지를 스필버그 감독은 동유럽 출신 중년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데 공항 밖의 세상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분을 증명할 국가가 사라져 공항에 갇힌다는 설정은 매우 극단적이어서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 같지만, 공항을 사회의 축소판으로 놓고 보면 사실 빅터, 루렌도, 나세리 씨 등이 겪는 일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인력이 기계로 대체돼 일자리가 사라진다거나, 직장에서 오해가 커져 억울한 징계를 받는다거나, 피해자가 되레 가해자로 몰린다거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중요한 심사에서 계속 탈락하는 등 시스템이 개인을 배척하는 일은 꽤 자주 발생한다. 이때 준비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닉에 빠질 것이다.
빅터 역시 처음엔 당황해 크라코지아 위기를 방송하는 TV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불편한 잠자리를 개선하기 위해 공항 의자를 뜯어고쳐 간이 침대를 만들어가며 그는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가 지닌 목공술과 응용력은 생존 무기가 되어준다. 영화 <터미널> 속 빅터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자.
“비즈니스인가요, 관광인가요?”
영화는 여권심사대의 직원들이 여행객들에게 던지는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세계 경제의 수도라는 뉴욕,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선망의 도시 뉴욕에 이제 막 도착한 빅터 나보스키는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할 새도 없이 공항관리국 사무실로 끌려간다. 그의 모국 크라코지아에 쿠데타가 발발해 여권이 정지되자 그는 무국적자로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된다.
존재는 하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가 빅터에게 어울리는 수식어일 것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연기해서 더 그렇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불시착한 뉴욕 JFK 공항은 무인도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코스모폴리탄 지구촌의 축소판에 더 가깝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나거나 도착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항이 무인도와 닮은 점도 있다. 그들에게 공항은 목적지로 가기 전 잠시 머무는 장소일 뿐이어서 그들이 떠나고 나면 텅 빈 공간만 남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무인도에서 구한 것은 그의 불굴의 용기와 도전정신이었지만 빅터 나보스키를 공항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공동체 정신이다. 그는 67번 게이트 근처에 홀로 서식하며 머물게 됐지만 그의 천성은 그를 생존 위기에서 구하는 것을 넘어 공항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다. 아버지를 위한 약을 반출하려던 한 러시아인에게 일부러 약의 사용처를 염소라고 잘못 통역해 도움을 준 에피소드는 그에게 ‘염소맨’이라는 별명까지 선물하는데 영어로 염소를 뜻하는 ‘GOAT’에는 최고의 영웅(Greatest Of All Time)이라는 의미도 있다.
처음에 빅터를 의심하고 적대감을 보이던 공항 직원들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삭막한 무인도 같던 공항은 제법 살 만한 곳으로 바뀐다. 물걸레질하는 굽타, 청소하는 서먼, 카트를 나르는 엔리케, 비자 발급 심사대의 토레스, 공항을 지키는 멀로이 등이 빅터의 친구가 되어준다. 오직 한 사람, 공항관리국 책임자 프랭크만이 빅터를 향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는다.
“저기가 뉴욕으로 나가는 문이야. 5분 동안 아무도 지키지 않을 거야. 그냥 통과해도 아무도 모르지.”
프랭크는 빅터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여권이 정지된 빅터를 공항에 풀어주면 몰래 빠져나가 불법이민자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아마도 프랭크에겐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 약은 면이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빅터가 불법 이민자가 되는 건 골치아프지만 내 소관만 아니면 된다는 ‘님비(NIMBY)’식 무사안일주의가 그가 그동안 관료사회에서 승승장구해온 비결이다.
빅터에게 프랭크의 제안이 솔깃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문 앞에서 서성거린다. 하지만 결국 공항을 빠져나가지 않는다. CCTV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경비원은 없지만 시스템이 여전히 그를 감시하고 있기에 비록 문밖을 나서더라도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으로 알고 있다. 영화 속에서 동유럽에 위치한 크라코지아는 공산권 독재국가인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 살아왔을 빅터가 생사의 기로에서 스스로 체득한 생존법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영화 후반부에 빅터는 비자를 받지 못했음에도 공항을 빠져나가 뉴욕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크라코지아가 마침내 정상 국가가 되었고 이제 고국으로 추방되어야 할 시점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하루짜리 뉴욕 방문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공항의 수많은 직원들이 빅터의 응원군이 되어 따라나선다. 굽타는 자신이 추방당할 것을 각오하고 크라코지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막아서 빅터에게 시간을 벌어준다. 그동안 빅터에게 도움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선물을 챙겨준다. 프랭크는 뉴욕으로 향하는 빅터를 막으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하지만 빅터 앞에 선 멀로이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는 오히려 춥지 말라고 빅터에게 외투를 입혀준다. 사람들에게 심어준 믿음이 결정적인 순간 보답받는 이 장면은 영화의 감동적인 클라이막스로 손색이 없다.
영화 초반에 철저한 준법정신을 발휘하던 빅터는 피플 파워를 등에 업고서야 비로소 금단의 선을 넘어간다. 이민자들과 불법 체류자들로 이루어진 또다른 의미의 코스모폴리탄 세계인 공항 직원들이 빅터에게 느낀 동병상련은 커다란 구심력으로 작용해 프랭크의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게 한다. 피플 파워를 얻기 전까지 빅터는 프랭크의 괄시를 묵묵히 견디면서 비자 스탬프를 받을 수 있기를 기다려왔다. 비록 지금 힘들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올 때까지 버티면서 기다리는 것, 그것이 빅터가 위기를 기회로 바꾼 힘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빅터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을 버티게 해준 오래된 사연이 있었다.
빅터가 뉴욕에 온 이유는 스튜어디스 아멜리아와 데이트할 때 드러난다. 빅터의 아버지는 미국의 재즈 거장 57명이 한 자리에 모인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고 답장으로 받은 친필사인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유독 한 뮤지션에게서만 사인이 오지 않았다. 사인이 오기를 계속 기다리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빅터는 색소폰 연주자인 베니 골슨에게 직접 사인을 받기 위해 뉴욕으로 온 것이다.
빅터의 이야기를 듣는 아멜리아의 눈가가 촉촉히 젖는다. 매순간 사랑받지 못하면 불안해 어쩔 줄 몰라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던 그녀에게 빅터의 오랜 기다림은 현실이라기보다는 꿈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빅터는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의 오랜 기다림을 채워주는 사람, 떠나는 아멜리아를 굳이 붙잡지 않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사람, 어눌해 보이지만 속 깊은 사람, 오해받더라도 자신보다 딱한 처지에 있는 약자를 돕는 사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 시스템이 가로막아도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살 길을 찾는 사람… 어떻게 보면 그는 누구보다 체제에 순종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규합해 공항과 뉴욕 사이 국경이라는 ‘선’을 넘는 ‘작은 혁명’을 이루어내는 것도 결국 그다.
루렌도 씨 기사에 달리는 험악한 댓글들의 분위기는 아마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를 우리와 다른 타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인 이상 난민에 대한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공포심으로 번지기도 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범죄 뉴스를 접할 때 이민자들은 가장 먼저 의심받는데 이는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체득한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볼 때 그를 국가, 인종, 연령, 성별 등으로 범주화해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고통은 모두 개별적이다. 루렌도 씨의 사정이 특이해 보여도 우리 모두 조금 다른 상황에서 루렌도 씨처럼 시스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누군가에게 또다른 고통을 주게 될까 염려스럽다.
지금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 <터미널>의 빅터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작은 배려가 언젠가 더 큰 배려로 돌아온다는 베풂의 선순환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들의 직업을 집어삼켜도, 남들에게 공평하다는 시스템이 자신을 계속해서 배신해도, 그래서 때론 삶이 패닉에 빠질지라도 위기를 딛고 일어날 힘은 결국 사람에게 있다. 루렌도 씨 가족에게도 ‘작은 혁명’이 일어나길 바래본다.
* [BBB] 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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