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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미화한다.” 영화 ‘조커’에 쏟아지는 우려의 목소리 일부다. 지난 2012년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미국에서 극장 내 총기 난사 사건을 불러일으켰기에 우려는 증폭된다.
“그 폭력을 잉태한 건 약자를 돌보지 않는 잔혹한 사회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극심한 빈부격차에 주목하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처럼 ‘조커’는 양면적인 캐릭터 만큼이나 양면적인 영화다.
‘조커’는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 중 이례적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베니스는 후자에 더 주목한 듯하다. 복지 예산이 줄면서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고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를 깔보는 고담시는 극우파가 세를 확장하는 유럽 혹은 트럼프의 미국과 겹쳐 보인다.
마블과 DC를 막론하고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개인의 능력과 의지를 통해 얼마든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설파해왔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이라도 좌절하지 않고 특수 장비와 초능력과 외계인의 도움 등 온갖 방법으로 능력치를 업그레이드하면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해왔다. 이에 반해 영화 ‘조커’는 나쁜 사회 시스템이 슈퍼빌런을 잉태한 원인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차별화한다. 억눌려 있던 하층민의 분노가 폭동으로 번지는 장면은 켄 로치 영화를 무색케 할 정도로 선동적이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심한 빈부격차가 잉태한 괴물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과대망상증을 가진 엄마와 단둘이 사는 30대의 사회 부적응자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향해 전진하지만 재능은 노력을 배신한다. 그는 번번히 실패하고 쓰라린 좌절을 맛본다.
웃음발작과 망상증, 그리고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그가 살아가기에 고담시는 지독하게 잔인한 사회다. 가난한 자를 위한 무료 심리상담은 예산 삭감으로 끊기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한다. 약한 자들은 더 약한 자를 괴롭히고 강한 자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극심한 빈부격차를 모른 척하며 살아간다. 극장에서 턱시도를 차려 입고 찰리 채플린이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로 분한 영화 ‘모던 타임스’를 보는 상류층의 모습은 이율배반적이다.
골목과 지하철에서 놀림받고 구타당하던 아서는 우발적 살인을 통해 순식간에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면서 코미디언말고도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찰에 쫓기던 그는 춤을 추면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 장면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계단 장면만큼이나 상징적이다. ‘기생충’의 계단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엄청나게 큰 간극을 시각화했다면 ‘조커’의 계단은 성공을 갈구하던 루저가 더 이상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계단 장면 이전에 아서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두 명의 동료를 만난다. 자신에게 총을 준 남자는 죽이고 키가 작은 남자는 자신에게 잘해주었다는 이유로 살려준다. 누군가를 죽일지 살릴지를 결정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계단에서 춤을 추는 아서는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동안 그가 아무리 선의를 드러내도 사람들은 그를 무시해왔다. 단지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함부로 판단하면서 그의 ‘인정욕구’를 짓밟았다. 철학자 헤겔은 인정욕구는 생사를 건 인정투쟁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끝모를 바닥으로 추락한 아서의 인정욕구는 살인을 통해 어느 정도 충족되자 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폭동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대는 세상에 짓밟힌 자들을 이끌어줄 반영웅을 필요로했다. 조커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기 시작한다. 그를 무시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두려워한다. 선의와 악의가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된 아서에게 코미디언으로 성공해 인정받는 것과 폭동으로 인정받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억눌리고 억압받아온 인정욕구는 한 번 날개를 달자 무섭게 날아오른다. 조커는 그렇게 암흑 속 고담시의 반영웅으로 등극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태어난 조커
잔혹사회라고 모두가 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조커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를 빌려온다. 그는 모든 신경증의 원형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고 했던 정신분석학자다.
영화는 도입부에 아버지의 부재를 강조한다. 그리고는 두 명의 유사 아버지를 투입한다. 한 명은 고담시장에 출마한 부유한 기업가 토마스 웨인(브레트 컬렌)으로 생물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또 한 명은 성공한 토크쇼 사회자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으로 심리학적 아버지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아서가 토마스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모호하게 처리한다. 조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원작 코믹스에도 나온 적이 없다. 아서는 토마스를 만나지만 그는 아서를 향해 주먹을 날리며 브루스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한다. 둘이 배다른 형제일지 모른다는 궁금증은 배트맨과 조커를 숙명의 라이벌로 만들기 위한 설정이다. 영화 ‘배트맨’(1989)에선 조커가 토마스 부부를 살해하지만 이 영화에선 흥분한 폭도들이 토마스 부부를 죽이는 것으로 그려진다.
토마스보다 더 흥미로운 인물은 머레이다. 그는 아서의 롤모델로 아서를 누구보다 챙겨준다. 그는 자신의 토크쇼 방청객으로 온 아서를 무대로 부른 뒤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했다며 감싸안고 "내 아들"이라고 부른다. 나중엔 아서를 자신의 토크쇼에 출연시키면서 새로운 이름 ‘조커’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한다. 아서는 머레이를 통해 조커로 새롭게 태어난다.
영화 후반부에 두 아버지는 잇따라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조커가 홀로 서기 위한 비극적 장치다.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왕이 된 오이디푸스처럼 조커는 머레이를 겨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고담시내 거리 한복판에서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대관식을 갖는다.
코미디의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조커를 세상에 소개하는 심리학적 아버지인 머레이 역할을 로버트 드니로가 맡은 것은 아서의 과대망상증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캐스팅이다.
드니로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코미디의 왕’(1982)에서 아서와 거의 판박이 캐릭터인 루퍼트 펍킨을 연기한 적 있다. 루퍼트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과대망상증에 빠진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으로 톱스타인 토크쇼 사회자를 납치해 자신을 출연시키라고 종용한다. 영화 ‘조커’에서 드니로는 37년만에 역할이 바뀌어 자신이 스토킹하던 유명 토크쇼 사회자를 연기한다.
영화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
아서와 루퍼트 모두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는 폭력적인 인물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루퍼트는 폭력이 불러일으킬 결과를 알면서도 자신이 상상해온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물인 반면, 아서는 폭력 자체가 자신의 존재이유가 되어버려서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싸이코패스라는 점이다.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이 자살하는 것을 코미디랍시고 구상할 정도로 폭력에 무감하다. 머레이는 아서가 무대에서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동영상을 보면서 그의 이름을 조커라고 붙여주는데 그가 자살을 혼자 웃기다고 상상하는 장면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코미디는 자신보다 못한 악인을 모방하려는데서 발생한다고 했다. 지독한 외로움과 컴플렉스에 빠져 있던 아서는 자기보다 더 열등한 악인을 발견할 수 없었고 대중을 웃기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코미디는 주관적인 것”이라고 선언한 후 자신을 열등하다며 비웃는 자를 처단한다.
'코미디의 왕'와 '조커'의 엔딩은 전혀 다르지만 루퍼트와 아서가 미디어의 힘으로 왕이 된다는 점은 비슷하다. 무명의 루퍼트는 8700만 가구가 시청한 TV쇼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진짜 코미디의 왕으로 등극한다. 조커 역시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며 악당들의 왕으로 거듭난다. 두 영화 속에서 미디어는 군중심리를 자극하고 증폭시켜 이들의 폭력을 성찰의 대상이 아닌 모방의 대상으로 소비할 뿐이다.
그렇게 고담시는 폭력적인 도시가 되어 간다. 스콜세지 감독이 누구보다 뉴욕을 비열하고 잔혹한 도시로 묘사해온 거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토드 필립스 감독이 영화 ‘조커’를 만들면서 코미디의 왕을 조커의 대부이자 희생양으로 소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담시는 단지 코믹스 속 도시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여기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거부할 수 없는 조커
2017년 DCEU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조커’ 프로젝트가 처음 발표됐을 때 워너브라더스의 캐스팅 1순위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하지만 토드 필립스 감독은 강력하게 호아킨 피닉스를 원했고 그 선택은 옳았다. 그는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자신만의 조커를 창조해냈다. 호아킨 피닉스가 DC유니버스로 들어간 게 아니라 DC가 호아킨 피닉스의 세계로 들어왔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살인청부업자,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약물에 절어 사는 사립탐정, ‘마스터’에서 술 취해 난동부리는 참전용사, ‘위 오운 더 나잇’에서 뉴욕경찰인 형과 대립하는 나이트클럽 매니저 등 호아킨 피닉스의 필모그래피는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거칠고 외로운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그가 연기한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있다.
24kg을 감량해 앙상한 몸으로 표현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남자, 웃는건지 우는건지 애매한 표정으로 불안감을 전염시키는 남자,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성공할 것 같지도 않은 코미디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모습이 안쓰러운 남자. 전반부에 보호본능을 유발하다가 어느 순간 자아도취에 빠진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질 때 관객은 악마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0/26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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