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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새 피고 지는 꽃이 있다. 백합과에 속한 원추리라는 이름의 이 꽃은 하루백합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인디애나주 미시간에 사는 80대 노인 레오 샤프는 하루백합을 사랑해 평생 원예에 헌신했다. 그의 농장은 백합 마니아들의 순례지로 명성을 얻었고, 그는 화훼 분야의 상을 휩쓸었을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보라색 백합 ‘실로암 레오 샤프’도 정식 등록돼 있다.


1924년생인 그는 젊은 시절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국가에 헌신한 베테랑에 대한 예우가 깎듯한 미국에서 화훼사업가로 살아온 그는 존경받으면서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프는 2011년 10월 21일 엘 차포가 이끄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마약조직 시나올라 카르텔의 운반책으로 긴급 체포된다. 이때 그의 나이 87세였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그를 잡기 위해 무려 12명의 수사관을 출동시켜 디트로이트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막았다. 80대의 전쟁영웅은 왜 마약운반책이 됐을까?


레오 샤프


레오 샤프의 실화 vs 영화


영화 ‘라스트 미션’(원제는 The Mule로 이 단어에는 마약운반책이라는 뜻이 있다)은 세계 최고령 마약운반책인 레오 샤프가 붙잡힌 뒤 뉴욕타임스 샘 돌닉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풀어 쓴 장문의 기사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각본가 닉 솅크가 기사를 각색해 시나리오를 쓰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및 주연을 맡았다.



이스트우드는 레오 샤프를 바탕으로 얼 스톤 캐릭터를 만들면서 여기에 자신의 인생을 일부분 녹였다. 80대 노인이 무시무시한 조직원들과 맞짱 뜨면서 경찰에 들키지 않고 마약을 운반하는 과정을 재미 포인트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가 자신처럼 노인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던졌다. 노인의 시점에서 본 세대 간의 차이(“당신들 세대는 인터넷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잖아?” “그쪽 세대는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 없이 다 하죠”), 즐기면서 일하는 게 꽉 짜여진 채 일하는 것보다 더 성과가 좋다는 지혜와 더불어 가장 강조되는 메시지는 일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뻔한 이 메시지는 그러나 화자가 노인이자 망쳐버린 가족 관계를 후회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원추리에 빠져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 멀어진 영화 속 스톤처럼 촬영 당시 88세였던 이스트우드 역시 젊은 시절부터 영화 일에 몰두하느라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영화는 이에 대한 절절한 반성문처럼 보인다(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마초 배우인 이스트우드에게 정확히 몇 명의 가족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 6명 이상의 여성으로부터 8명 이상의 자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건 다 사도 시간은 못 사겠더구나.”


마약운반을 하며 불법으로 번 큰돈을 로빈후드처럼 주위에 베풀면서 쓰던 스톤은 12년째 내외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지만 90세를 바라보는 스톤에겐 돈이 필요한 이유가 명확하기에 변할 일이 없다. 그 이유란 가족과의 관계 복원과 참전용사로서 동료들과의 추억을 지키는 것이다. 원예를 하는 동료들이 모인 파티에서 그는 친구에게 아직도 안 죽고 있느냐고 농담한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에 시간이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뒤늦게라도 가족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노력하고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에 나선다.



마약운반에 뛰어든 서로 다른 이유


레오 샤프는 코카인 1킬로그램당 1천달러의 배송료를 받았다. 그가 체포될 당시 그의 링컨 픽업트럭엔 코카인이 무려 300킬로그램이나 실려 있었다. 그는 2010년에만 1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늙은 백인에 2차대전 참전용사(영화에선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그는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멕시코 국경에서 디트로이트까지 마약을 운반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스톤은 가족과의 관계 복원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실제 샤프가 마약운반에 뛰어든 이유는 영화와 달랐다. 샤프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고 증손자까지 있는 증조할아버지였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 가족관계보다는 망해가는 사업이 그가 마약운반을 시작한 직접적인 이유였다. 샤프가 처음으로 마약을 운반한 것은 그의 나이 70대 중반인 2000년경으로 인터넷 시대가 막 열린 때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그의 사업은 급격히 무너져내렸다.



샤프가 만든 하루백합 카탈로그는 이 분야의 클래식이었다. 그는 카탈로그를 통한 주문을 통해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하루백합을 팔았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책의 가치는 사라져갔다. 그의 카탈로그는 점점 얇아지더니 나중엔 흑백으로 바뀌었다. 영화에서 스톤이 인터넷을 모른다며 손사래치는 것처럼 샤프에게 인터넷은 난공불락이었다. 마침 그의 농장에 단기 근무하던 멕시코인들이 있었고 이들에게 받은 정보를 통해 샤프는 마약 운반에 눈을 뜨게 됐다. 처음엔 현금을 운반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점 일이 커졌다. 그는 2011년 체포되기 전까지 10년 넘게 이 일을 했다.



마약 카르텔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종종 샤프처럼 전혀 의심받지 않을 사람을 운반책으로 고용한다. 네 번이나 심장마비를 겪은 50대의 장애인이 마약운반책으로 포섭돼 일하다가 체포된 적도 있다. 신원이 확실하고, 늙거나 장애로 도망가지 못할 사람이고, 범죄 경력이 없는 사람이 마약운반책으로 선택받는다. 샤프를 체포한 마약단속국 요원 제프 무어(영화에서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콜린 베이츠의 실제 인물)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수 년 동안 추적했지만 ‘타타(스페인어로 할아버지)’가 닉네임이 아닌 진짜 할아버지일지 짐작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원추리


하루백합 같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


원추리는 분진과 매연에 강해 도로변에 많이 심는다. 그래서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지만 꽃이 낮에만 피기에 금세 시든다.


스톤은 하루백합을 인생에 비유한다. 원추리가 낮에 꽃을 피운 뒤 시드는 것처럼 인생 역시 하루뿐인 빛나는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따라서 일도 돈도 모두 가족을 위한 것이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스톤은 시종일관 후회하고 있다. 자신이 마약운반책이 된 것에 대한 죄책감 역시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미화된 것이다. 실제 인물인 레오 샤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신이 창조한 모든 식물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며 코카인을 배달하는 것이 하루백합을 배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취지로 말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했다.


법정에서 샤프는 감옥에 가는 대신 하와이산 파파야를 재배해 공급하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는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지병이 악화돼 1년만에 출소한 뒤 몇달 후인 2016년 12월 92세로 자연사했다. 하지만 영화 속 스톤은 샤프와 다르다.



“당신은 내 인생의 사랑이자 고통이었어요.”


스톤의 전 부인 메리(다이앤 위스트)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용서한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90줄에 접어든 노감독은 영화를 화해의 눈물을 삼키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 과정에서 인과응보가 힘을 얻는다. 죄 지은 사람들은 벌 받고 용서를 구한 자는 구원받는다.


인생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은 어렵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쉽다. 인생이 길어질수록 누구나 한두 번은 위기에 처한다. 문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자기만의 원칙이 있느냐다. 현실의 레오 샤프에게는 원칙이 없었지만 영화 속 스톤에게는 있었다. 태연하게 불법을 저지르다가 붙잡혀도 스톤은 가족이 우선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에 여한이 없었다. 이스트우드는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한 순간에 무너진 참전용사에게 영화 속에서나마 품위를 불어넣어 인생을 마무리하게 한다.



총알 한 방에 악당을 처단하고 피의 복수를 일삼던 서부극 시대의 슈퍼히어로에서 용서, 화해 같은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는 감독으로 변신해 수많은 걸작을 남긴 이스트우드는 고령에 접어들어도 여전한 창작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 그를 보는 것은 점점 힘들어져서 이 영화는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 만의 출연작이다. 어떤 작품이 유작이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영화의 공기를 지배한다. 어릴 적 농장에서 일하던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걷던 것을 본 기억을 떠올려 따라했다는 영화 속 이스트우드의 걸음걸이와 쓸쓸해 보이는 주름 가득한 표정에는 슈퍼히어로가 흉내낼 수 없는 아우라가 살아 있다.


하루백합은 자신이 언제 피고 지는지 모른다. 꽃피는 영광의 순간이 그토록 짧은 줄 안다면 그 순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을 것이다. 꽃밭을 일구며 회한에 잠긴 이스트우드가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강조하는 가족의 중요성은 다분히 ‘꼰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베이츠 요원의 말처럼) 한 번쯤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라스트 미션 ★★★☆

언제 마지막일지 모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우라.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5057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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