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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좋아하거나 죽도록 싫어하거나.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 대한 평가에서 중간은 없다. ‘살인마 잭의 집’은 그의 영화세계의 정점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열린 첫 시사에서 100여명의 관객이 견디지 못하고 극장을 빠져나갔지만 반대로 영화가 끝난 뒤에는 10분 이상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프랑스 평론지 ‘까이에 뒤 시네마’는 이 작품을 2018년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으로 선정한 반면, 뉴욕타임스 평론가는 “영화 시작 10분만에 최악의 기분이었다”며 “다시 떠올리기 역겹다”는 리뷰를 남겼다.
"내 영화가 싫다고요? 정말 충분히 싫어한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폰 트리에는 영국 옵저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정말로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서 아쉽다고도 했다. 그는 연쇄살인마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 속에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것들을 다 모아놓았다. 여자와 아이까지 잔인하게 죽이고 동물도 학대한다(다행스럽게도 영화 속 오리의 발 절단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것으로 제작진은 어떤 동물도 다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가 완성된 뒤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이 작품을 유언으로 받아들여달라고 말했다. 그가 은퇴를 번복하지 않는다면 '살인마 잭의 집'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을 예감한 것처럼 영화 속엔 그가 그동안 불러일으킨 논란거리가 모두 들어있다. '킹덤'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 등 전작들 속 문제의 장면들이 회고적으로 삽입돼 있을 뿐만 아니라 성추행, 여성혐오, 사디즘, 파시즘, 강박증, 조울증 등 그를 영화계의 이단아로 각인시킨 원인이 된 행위들에 대한 변명도 담겨 있다.
영화 속 연쇄살인마 잭(맷 딜론)은 "왜 항상 남자들이 잘못했다는 거지?"라고 주절거리고, 핏자국에 바닥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계속 걸레질을 하고, 트럼프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를 쓰고 아이들과 여자를 저격한다. 또 여자친구 앞에서 심한 감정 기복을 드러내고, 강력한 살상도구인 풀 메탈 재킷 탄을 구하기 위해 집착한다. 초반부에 자신이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밝힌 잭은 살인이 계속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괴롭힌 증상들로부터 해방되었다며 기뻐하기도 한다.
라스 폰 트리에
영화는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성립한다. 지구상의 누구도 이런 영화를 만들기 힘들고 만들더라도 이 정도로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폰 트리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문제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폭로한 '어둠 속의 댄서'의 주연배우 비요크는 작업하는 과정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영혼까지 갉아먹는 사람"이라며 치를 떨었고, 니콜 키드먼과 커스틴 던스트도 한 작품을 같이 하고는 등을 돌렸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성기 절단 장면,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실제 출산 장면, '님포매니악'의 실제 성교 장면 등은 무수한 뒷말을 남겼고, '멜랑콜리아'를 공개하는 기자회견에서 "나는 나치다"라는 발언으로 칸영화제에서 추방당한 사건은 화룡점정이었다.
영화는 살인 무용담을 늘어놓는 잭과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의문의 남자 버지(브루노 간츠)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잭은 자신을 '교양살인마'라고 정의하며 살인이 문학, 음악, 건축에 버금가는 예술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죽은 포도로 와인을 숙성시키는 것처럼, 혹은 동물을 죽여 박제하는 것처럼 그는 인간을 재료 삼아 똑같은 작업을 하는데 재료가 스스로의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가 살인을 예술로 간주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예술은 때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입힌다. 그렇다면 상처의 극단적 형태인 살인도 예술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잭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예술가의 사례를 제시한다. 하느님이 호랑이와 양을 동시에 창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면서 살인자와 피해자에게도 제각각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또 피아노 천재 글렌 굴드가 연주할 때마다 강박증에 시달렸던 것이 자신의 피에 대한 강박증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예술지상주의자인 잭에게 예술의 궁극적인 형태는 건축이다. 그는 강박적으로 집을 짓고 부수고 새로 짓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급기야 시신으로 집을 짓는다. 이 건축 장면에는 감독이 자신의 '나치 발언' 논란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폰 트리에는 나치 발언 이후 문제가 커지자 히틀러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뛰어난 재능을 칭송하려다가 농담조로 한 말이었다고 수시로 해명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감독이 겪은 이런 상황은 영화 속에서 잭과 버지가 나누는 대화 속에 녹아 있다. 버지는 잭의 주장들이 사회 통념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궤변임을 수시로 주지시키지만 잭은 인정하지 않는다.
잭과 버지는 2시간 3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서로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버지는 때론 잭에게 동조하면서 또 때론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다. 버지는 관객이 잭을 이해하도록 돕는 길잡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예술가와 평론가의 관계를 닮았다.
버지는 수시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계속해서 나를 교묘하게 속이고 있군요." 이 말은 폰 트리에의 영화에 대해 그동안 많은 평론가들과 관객이 해온 말이다. 그가 1995년 도그마 선언으로 영화 순수주의를 주장했을 때, 또 인간의 극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우울증 3부작'을 내놓았을 때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그의 영화를 폄훼한 평론가 중 상당수는 속임수라고 썼다. 자신이 내놓은 도그마 10계명을 본인도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고, 인간 본성에 천착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신체강탈 포르노를 만들었다고 경멸했다.
폰 트리에가 스스로 유작이라 칭한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쇄살인마로 만든 것은 그동안 받아온 비판에 대한 조롱 섞인 정면도전임과 동시에 굽히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그는 연쇄살인마 잭에 자신을 투영해 예술지상주의자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는 한편 버지를 통해서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그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저 자는 현세에서 참 거만했지.
남을 만한 선행은 아무 것도 안 했어.
그래서 그 그림자가 저렇게 미쳐 여기 산다네.”
단테의 '신곡' 중 한 구절로 폰 트리에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구절이다. 폰 트리에는 영화를 단테가 상상한 지옥풍경에 잭을 대입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영화는 에필로그에서 외젠 들라크루아의 출세작이자 신곡의 지옥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걸작 '단테의 조각배'(1822)를 초현실적인 영상으로 재현한다. 그림 속에서 단테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으로 향하는 스틱스강을 항해하고 있다. 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 불안한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한다.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The Barque of Dante)'
영화 속에서 단테의 자리에는 잭이 불안정하게 서 있고, 베르길리우스 자리에는 버지가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버지 Verge는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후 두 사람은 지하로 하강해 지옥 속으로 들어간다. '신곡'의 지옥편에서 살인의 죄를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피가 끓는 강 속에 잠긴 채 삶아지는 것이었다. 반인반마 켄타우로스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어 영원히 고통받아야 한다.
잭과 버지도 피 끓는 강에 당도한다. 강을 건널 다리가 끊어져 있어서 잭은 방법을 모색한다. 이때 잭은 끝까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고집한다. 버지가 그 길은 아무도 성공한 적 없는 길이고 돌아가는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해주지만 잭은 굽히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자신만의 길을 간다.
이 마지막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다. 폰 트리에는 자신은 피 끓는 강에 빠져 죽을지언정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화세계를 마무리한다. 영화 속에서 잭은 60명을 죽인 것으로 나오는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집필할 당시인 2016년 폰 트리에의 나이는 60세였다.
이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은 표현의 한계를 모르는 폰 트리에만의 예술지상주의적 태도에 대리만족을 느낀다. 반면 이 영화를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모든 상식과 터부를 무시할 정도로 비윤리적인 것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이 영화는 오랫동안 오해받아온 한 영화감독의 타협을 모르는 자기변론임과 동시에 논쟁을 즐기는 한 나르시시스트 예술가가 마침표를 찍는 그만의 예술적인 방식이다.
살인마 잭의 집 ★★★★
심한 자뻑이 만든 예술. 나르시시스트의 영화적 자살.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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