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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제목은 참 야심만만하다. 박정희 정권 이후 경제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뉴스릴 장면의 도입부도 강렬하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중소기업 사업가, 영리한 투자가 등 세 개의 이야기축을 놓고 진행되는 전개도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중반부터 힘이 빠진다.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 모두가 다 아는 1997년 11~12월의 IMF 구제금융 협상 과정을 2시간 동안 이야기하려면 새로운 정보가 있거나 재미가 있거나 감동이 있어야 할텐데 다들 고만고만하다. 한국은행 내 협상과정을 제대로 기록한 보고서가 있다는 것이 새로운 정보이고, 남들 망할 때 역발상 투자하는 투자자가 재미를 담당하고, 자살 위기에 몰린 공장 사업가가 슬픔을 자아내는데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아주 특별하지 않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역발상 투자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영화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갈피를 못 잡는 것처럼 보인다. 김혜수가 연기한 한시현 팀장은 줄곧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맞다. 당시 그런 주장이 많았고 뉴스에선 ‘국치일’이라고 했고 지금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런데 그 전에 영화가 제기하는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무분별한 대출로 인해 무너진 신용(여신)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했어야 했던 것일까. 한 팀장이 주장한 것처럼 일본이나 미국에서 단기자금을 빌려와 급한 불을 꺼서 위기를 넘겼어야 했던 것일까. 영화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무너진 신용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나. 관객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지금 이렇지는 않을텐데. 그때 저렇게 놔두지 않았다면 지금 이랬을텐데. 영화는 이런 상상력을 더 발휘했어야 했다. 이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게 영화의 기능이자 목적일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결국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았고, 그로 인해 비정규직이 늘어났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로 체질이 변경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다. 단지 이것을 인지시키려고 영화를 만들었단 말인가? 만약 이것이 의도였다면 감독은 차라리 극영화가 아닌 유튜브에 올릴 미니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야 했던 것 아닐까.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2017년 1월 개봉한 영화 ‘더 킹’이 자꾸만 오버랩됐다. ‘더 킹’도 뉴스릴 화면으로 시작해 역사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검찰 내부의 문제를 고발하는데 ‘국가부도의 날’보다 훨씬 상상력이 풍부하다. 권력 교체 과정에서 물고 물리는 인간관계에 따라 캐릭터가 변화하는 과정도 다층적이다. 영화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눈여겨 보게 된다. 반면 ‘국가부도의 날’ 속 인물들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평범한 공장장 갑수(허준호)

검은 머리 외국인 재경부 차관(조우진)

IMF 총재(뱅상 카셀)


영화가 진행될수록 필자는 도대체 결말을 어떻게 맺을까 궁금했는데 영화는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 마무리해버렸다. 드라마 상에서 이야기를 마무리짓지 않고 시간을 건너 뛰어버린 것이다. 이런 쉬운 방식은 설득력이 약한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가 주장하는 것처럼 IMF 외환위기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 가계부채 위기가 국가부도 위기의 전조인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비정규직이 늘어난 책임이 있는 전직 재정경제원 차관은 왜 금융기업 공채 면접을 보면서 일자리를 늘려주고 있는가? 직원에게 따뜻하고 마음 여리던 공장장이 외국인 노동자를 하대하는 모습에선 할 말을 잃었다. 이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차라리 외국인 투자자에게 엄포를 놓는 엔딩이었어야 캐릭터의 일관성이 있지 않을까?


한시현의 내레이션은 “우리 모두 깨어 있으라”고 하는데 외국인 노동자 하대하는 공장장을 구하기 위해 깨어 있을 이유는 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렇듯 영화가 성급하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다 보니 지나치게 감정적인 마무리가 되었다. 김혜수와 유아인의 연기는 흡입력이 있지만 영화는 많이 아쉽다.


국가부도의 날 ★★☆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상상력 부족한 기획.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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