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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유튜브 영상, 매일경제 기사로 먼저 발행한 콘텐츠의 풀 버전입니다.


오는 24일은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지 27년째 되는 날이다. 1987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91년 11월 24일 런던 켄싱턴 자택에서 45세를 일기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망 하루 직전인 23일에야 HIV 양성 반응 진단을 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미디어는 이를 대서특필했고 다음날 이 보도는 머큐리의 사망 소식으로 바뀌었다. BBC는 '록의 전설'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놀라운 흥행으로 인해 1970~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밴드 퀸이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머큐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인도계 동양인으로 영국 내에서 받았던 온갖 인종 차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을 마음껏 펼쳐 글로벌한 성공을 이룬 그의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준다. 하지만 2시간이 약간 넘는 영화는 머큐리의 삶에서 극적인 일부분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다 하지 못한 프레디 머큐리에 관한 20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1.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를 감추고 싶어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9월 5일 잔지바르(탄자니아)의 스톤 타운에서 태어났다. 인도 출신의 그의 아버지는 영국 식민지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잔지바르로 발령받아 간 도중에 그를 낳았다. 머큐리는 잔지바르에서 인도를 거쳐 10대 때 잉글랜드 미들섹스로 이사했다. 그는 뭄바이 인근 성 피터스라는 기숙학교에 다닐 때 이름을 프레디로 바꿨다. 법적으로 이름과 성을 아예 프레디 머큐리로 바꾼 것은 20대 중반인 1970년 퀸이 막 결성됐을 때다.


머큐리는 잔지바르와 인도 시절을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한 번은 공연이 끝난 후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퀸의 홍보를 맡았던 한 직원은 머큐리가 죽고 나서야 그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2. 히스로 공항의 수화물 운반원이었다


머큐리는 음악을 하기 전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수화물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 비행기에 실은 손님들의 짐을 공항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2018년 9월 5일 브리티쉬 에어웨이의 히스로 공항 수화물 운반원들은 살아 있다면 72회 생일을 맞았을 그들의 선배를 기리며 ‘I Want to Break Free’의 노래에 맞춰 춤 추는 영상을 공개했다.




3.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의 팬이었다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드러머 로저 테일러는 대학 시절 이미 스타였다. 그들은 ‘스마일’ 이전에도 다른 밴드를 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머큐리는 스마일의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했다. 보컬인 팀 스타펠과도 친하게 지냈다. 스타펠이 밴드를 탈퇴하자 메이와 테일러는 머큐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머큐리는 즉석에서 오케이해 팀에 합류했다.



4.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다


무대 위에서 터프한 모습과 달리 머큐리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로저 테일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머큐리의 실제 삶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는 샤이하고 젠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과 전혀 달랐죠.”


퀸의 사진작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프레디는 무척이나 상처받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고 그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손뼉을 치면서 어떤 요리가 나올지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면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기도 하고요. 또 아주 과묵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샤이한 성격이어도 타고난 끼는 감출 수 없는 법이어서 머큐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모습을 오갔다. 대학 시절 그는 밴드 '스마일'의 보컬 팀 스타펠과 친하게 지냈는데 강의실에서 종종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낯선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크게 떠들면서 장난 치는 경우도 많았다.


1991년 파파라치에 의해 찍힌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모습.


5. 언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인도계 파시족으로 인종 차별, 게이 의혹 등 머큐리는 언론에 가십거리로 등장할 때가 많았다. 파파라치도 자주 따라다녔다. 이런 언론을 머큐리는 끔찍하게 싫어했다.


게다가 음악 평론가들은 그가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악평을 쏟아냈다. 듣도보도 못한 음악이라는 이유였다. 머큐리는 계속된 악평에 짜증이 폭발해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해요” 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그의 절친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



6. ‘Queen’ 이름 짓고 엠블럼 디자인도 했다


머큐리가 밴드 이름을 스마일에서 'Queen'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을 때 다른 멤버들은 이 이름에 반대했다. ‘퀸’에는 ‘게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큐리가 이 이름을 고집해 결국 다른 멤버들도 따랐다.


머큐리는 1973년 퀸의 첫 번째 앨범을 내기 직전에 로고도 만들었다. 그의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으로 영국의 일링 예술대학에서 예술과 그래픽 디자인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엠블럼에는 퀸 4명의 멤버들의 별자리가 담겨 있다. 두 마리의 사자는 사자자리인 존 디컨과 로저 테일러, 게는 게자리인 브라이언 메이, 두 요정은 처녀자리인 머큐리를 상징한다. 사자들이 Q라는 글자를 붙잡고 있고, 게가 Q 위에 놓여 있고, 요정들이 사자 아래에서 쉬고 있는 그림이다. Q 안에는 왕관이 있고, 전체 그림을 거대한 불사조가 위에서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




7. 음역대는 4옥타브를 넘나들었다


머큐리는 어릴 때 성악을 배웠다. 하지만 누구에게 사사받을 정도로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타고난 미성으로 고음을 소화할 수 있던 그는 자신의 음역대가 바리톤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음을 테너 음역대에서 소화했다. 2016년 유럽의 과학자들이 머큐리의 음성을 분석한 결과 머큐리는 떨림음(비브라토)에 강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일반적으로 오페라 가수들의 비브라토가 5.4Hz~6.9Hz 사이를 오갔다면, 머큐리는 7.04Hz에서 움직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그는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바꿈과 동시에 창법도 바꿨다. 줄담배로 인해 미성이 예전 같이 나오지 않으면서 아예 탁성을 내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탁성은 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연을 오랫동안 하기 힘들다. 1980년대 이후 공연에서는 그가 고음이 많은 곡을 부를 때 키를 낮춰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8. ‘스탠드 없는 마이크’를 들고 노래했다


시작은 공연 중 벌어진 우연한 사고였다. 머큐리가 마이크를 집어든 순간 스탠드가 빠져버린 것이다. 그는 마이크 스탠드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대신 스틱만 있는 채로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멋지다고 생각한 그는 이 사건 이후 마이크에 스틱을 붙인 채 들고 다니며 노래했다.


스탠드 없는 마이크는 무대 위에서 종종 지휘봉이나 기타 대용품으로 쓰이며 머큐리의 퍼포먼스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발레에 관심이 많았던 머큐리는 1979년 로얄 발레 컴퍼니로부터 자선 공연 참가 초대를 받고 발레 연습을 한 적도 있다. 당시 그는 이브닝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습 이틀 만에 죽는 줄 알았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9. 악보를 볼 줄 몰랐다


머큐리는 오페라 록,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 록, 발라드, 팝, 디스코, 가스펠, 로커빌리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들었고 수시로 조를 바꾸는 복잡한 구성도 시도했지만 정작 악보를 볼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곡을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로 종이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 주로 피아노로 작곡했는데 멜로디가 떠오르면 그걸 기억했다가 나중에 그 멜로디가 다시 떠오르면 그제서야 녹음을 시작했다.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 멜로디는 기억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인생의 동반자 메리 오스틴과 함께


10. 메리 오스틴은 브라이언 메이가 소개해줬다


머큐리에게 처음 메리 오스틴을 소개해준 사람은 브라이언 메이였다. 1970년 메이와 오스틴은 몇 번 만나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머큐리가 오스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메이는 수줍음 많던 머큐리에게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이때 머큐리는 24살, 오스틴은 19살이었다.


머큐리가 1975년 발표한 ‘Love of My Life’는 오스틴을 위해 만든 곡이다. 두 사람은 동거하며 지냈지만 머큐리가 1976년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놓으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오스틴과 우정을 유지했다. 머큐리의 다른 연인들이 오스틴을 질투해도 그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머큐리는 1985년에 이렇게 말했다. “나의 다른 연인들이 나에게 메리를 대체하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머큐리는 유언장을 통해 그의 재산 절반과 저작권료, 그리고 런던의 저택 ‘가든 로지’를 오스틴에게 남겼다. 28개의 방과 대형 정원을 갖추고 있는 이 저택의 현재 가치는 2000만 파운드(약 290억원)에 달한다. 2018년 현재 67세인 오스틴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이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가장 오래 지속된 동성 연인 짐 허튼과 함께


11. 짐 허튼과 비공식 결혼했다


머큐리는 1983년에 짐 허튼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985년부터 사귀기 시작해 1991년 머큐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 머큐리는 사람들에게 허튼을 정원사 혹은 이발사로 소개했다. 하지만 허튼은 투어 때마다 머큐리와 동행했고 생일 파티에도 꼬박 참석했다.


1986년 머큐리의 40세 생일에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물론 이 결혼은 당시에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잉글랜드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된 것은 2013년부터고, 미국에선 2015년부터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오른손 약지에 결혼 반지를 끼고 다녔다.


1987년 허튼은 머큐리의 HIV 감염 사실을 알았고, 1990년엔 그 역시 HIV에 감염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머큐리는 허튼에게 50만 파운드를 유산으로 남겼고, 런던의 집에서 계속 살도록 했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은 오스틴은 허튼을 집에서 쫓아냈다.


허튼은 2010년 암으로 사망했다.


머큐리에게 해고당한 뒤 그의 사생활을 폭로한 폴 프렌터와 한때 즐거웠던 시절


12.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힌 적 없다


머큐리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외부에 밝힌 적이 없다.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머큐리는 오스틴과 사귀긴 했지만 대학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그의 성 정체성을 눈치 채고 있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면서 ‘Darling’ 같은 말을 남자들에게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1987년 그에게 해고된 매니저 폴 프렌터가 거액을 받고 영국 일간지 ‘더 선’에 머큐리의 사생활과 죽은 동성 연인에 대해 폭로하면서 그의 성 정체성이 공개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머큐리는 한동안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프레디 머큐리는 애묘인이었다


13. 고양이를 10마리나 키운 고양이 집사였다


머큐리는 고양이를 사랑해 한 번에 10마리를 키운 적도 있다. 첫 솔로 앨범에 수록된 ‘Mr. Bad Guy’는 그의 고양이들에게 헌정한 노래이고, ‘Delilah’는 그가 가장 아끼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딜라일라, 딜라일라, 오 나의, 오 나의 사랑스러운

내가 울고 싶을 때도 너는 나를 미소짓게해

넌 나의 희망, 넌 나를 웃게 해

넌 잘못을 해도 벌받지 않아, 결백하지

하지만 넌 변덕스러워서 발톱을 세우고 깨물어

그것도 괜찮아!

딜라일라, 딜라일라, 오 나의, 오 나의… 넌 예측 불가능해

넌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해

네가 나를 껴안고 내 옆에서 잠들면

넌 나를 약간 미치게 하기도 해

내 치펀데일 가구에 쉬를 해버리거든


1980년대 중반 머큐리의 연인이었던 오스트리아 배우 바바라 발렌타인은 이런 에피소드를 전했다.

"하루는 메리가 런던에서 독일에 있던 제게 전화를 걸었는데 프레디의 고양이 중 한마리가 죽었으니 적당한 때를 봐서 알려주라고 하더군요. 전 고민하다가 프레디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슬퍼하더니 당장 런던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저 고양이가 죽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고 끝내 런던으로 갔습니다.”


래리 루렉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음반 재킷


14. ‘래리 루렉스’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낸 적 있다


머큐리는 퀸 1집을 녹음하면서 재미 삼아 The Ronettes의 ‘I Can Hear Music’을 녹음했다. 들어보니 의외로 괜찮아서 음반으로 발매했다. 이때 본명 대신 Larry Lurex라는 예명을 썼다.


한참 후 머큐리가 유명해지면서 지금은 이 음반이 희귀본으로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15. 튀어나온 입 컴플렉스 때문에 콧수염을 길렀다


머큐리는 튀어나온 입과 뻐드렁니에 컴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었고 의식적으로 입을 오므렸다. 콧수염을 기른 것도 튀어나온 입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턱시도를 입고 '바르셀로나'를 불렀다


16.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제가를 만들었지만 거절당했다


1987년 머큐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주제곡을 만들었다.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그가 평소 좋아하던 오페라 곡을 시도했다. 고음역대를 넘나드는 발성을 실컷 들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1년 머큐리가 사망한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위원회는 “에이즈로 사망한 가수의 노래를 주제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곡을 공식 주제가에서 제외했다. 대신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Amigos para Siempre’를 공식 주제가로 선정했다.


하지만 BBC는 올림픽 개막식 때 머큐리의 ‘Barcelona’를 틀어주면서 그를 추모했다.


프레디 머큐리가 그린 그림


17. 그림을 그렸다


머큐리는 종종 그림을 그렸다. 에이즈로 몸이 쇠약해졌을 때 그는 파파라치를 피해 집 안에만 머물렀다. 그는 TV에서 어떤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면 “내가 그려도 저것보단 잘 그리겠다”며 그 자리에서 직접 그림을 그렸다.


그는 허튼에게 “이 그림 내가 죽고 나면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항상 눈에 띄는 과감한 옷을 골라 '옷 못 입는 연예인'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했다.


18. 패션 테러리스트이자 패션 아이콘이었다


머큐리는 집착적으로 외모와 옷에 신경 썼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기로 할 때도 어떤 벨트를 매는 게 좋은지를 놓고 1시간 넘게 고민할 정도였다. 그는 공연 준비를 할 땐 예산의 절반을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었다. 멤버들은 그의 독특한 의상 취향에 보조를 맞추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의 패션 취향은 남달랐다. 그는 남들이 소화하기 힘들어 선택하지 않을 옷을 골랐고 고집적으로 입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머큐리는 영국에서 옷 못 입는 아티스트를 선정할 때마다 늘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퀸 초기에 그는 글램 록을 지향해 긴 머리, 검정색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몸에 딱 붙는 발레복을 주로 입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가죽옷을 선호했고, 이후엔 타이트한 트레이닝복, 흰 러닝셔츠, 화려한 재킷과 백바지 등으로 변화해갔다.


퀸의 콘서트는 패션쇼를 방불케 했다. 공연 막바지에 그는 왕관과 빨간 망토를 걸쳤고, 그 나라 국기를 두르고 나오기도 했다. 독특한 옷을 계속 입은 결과, 머큐리는 레이디 가가 이전 세대의 '와일드 패션 아이콘'으로 남았다.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뮤직비디오 'These are the Days' 촬영 현장에서.


19. 죽기 하루 전에 에이즈에 걸렸다고 밝혔다


머큐리는 매니저를 통해 1991년 11월 23일 HIV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 저택에서 숨을 거뒀다. 사인은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인 폐렴이었다.


그가 아프다는 사실은 몇 년 동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만 퀸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머큐리는 퀸 투어에 참여하지 않거나 몹시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팬들은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프레디의 죽음을 프론트 페이지 전면 사진과 함께 보도한 영국 일간지 'The Sun'


일부 팬들은 늦게 발표한 성명서를 안타까워했다. 일찍 발표했다면 치료를 위한 모금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레디는 1987년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고, 멤버들에게는 1988년에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알렸다.


런던 켄살 그린묘지에서 발견된 머큐리 추정 비석. 프랑스어로 쓰인 문장 ‘Pour Etre Toujours Pres De Toi Avec Tout Mon Amour’을 해석하면 ‘So I Can Always Be Close To You With All My Love’이다.


20. 화장된 유해는 런던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머큐리의 부모는 인도인으로선 드물게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고, 머큐리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조로아스터교도로 남았다.


머큐리 사후 그의 부모는 아들을 조장하려고 했다. 조장은 시신을 독수리나 까마귀, 매 등 조류에게 맡기는 장례 의식이다. 하지만 머큐리의 지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해 결국 화장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화장된 유해를 어디에 묻었는지는 오스틴만 알고 있었다. 이는 비밀 장소에 묻어달라는 머큐리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머큐리가 동성 연인 허튼이 아닌 오스틴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하고 자신의 유해를 맡긴 것은 그녀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아내였더라면 이것은 어쨌든 당신의 몫이었을 거예요.”


팬들과 언론은 머큐리의 유해가 어디 묻혀 있는지 20년 이상 수소문하고 다녔다. 하지만 오스틴은 “프레디를 배신할 수 없다”며 입을 열지 않았다.


2013년 런던 켄살 그린묘지에서 ‘파로크 불사라를 추억하며, 1946~1991’이라고 쓰인 비석이 발견됐다. 하지만 이후 이 비석은 또다시 어딘가로 옮겨졌다.



“2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휘두르는 방법을 배우려면 교황이나 프레디 머큐리를 보아야 한다.” - 데이브 그롤, 너바나


“난 스타가 되려는 게 아냐. 전설이 될 거야. (I'm not going to be a star, I'm going to be a legend.)” - 프레디 머큐리


R.I.P Freddie Mercury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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