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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라졌고 우리도 사라지겠지만, 영화는 끝나지 않고 저 선글라스도 사라지게는 못할 거다.”


88살 현역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과 33살 사진작가 JR의 로드무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Visages Villages)’은 매순간 아름답고 순수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93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두 사람이 포토 트럭을 몰고 프랑스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작지만 큰 선물을 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주민들이 이들의 예술 작업에 감동할 때 이를 극장에서 지켜보는 관객 역시 따뜻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JR와 아녜스 바르다


영화 홍보는 누벨바그의 아이콘 아녜스 바르다 감독에게 초점을 맞춰 한국 개봉명도 아예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바꿨지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 작업들은 사진작가 겸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JR의 방식입니다. 아녜스 바르다가 워낙 유명해 마태효과처럼 이 영화의 명성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JR 역시 “가장 야심만만한 스트리트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가입니다.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JR는 '반-익명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라고 불립니다. 이름도 본명 장 르네(Jean Rene) 대신 약칭인 JR을 사용합니다. JR는 검색하기 힘들 만큼 흔한 이름이죠. 구글에서 찾으면 일본국철만 잔뜩 나옵니다.


JR는 프랑스 출신으로 10대 때부터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같은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공공장소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계기라고 하네요. 루프톱, 지하철 등에 낙서를 하던 그는 17세부터는 사진을 찍어 출력해 외벽에 전시하는 방식의 새로운 낙서를 고안합니다. 이후 JR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의 사진을 건물 벽에 전시했습니다.


JR


2004~2006년 JR는 ‘세대의 초상’이라는 프로젝트를 시행합니다. 파리 주택 프로젝트에 참가한 젊은 사람들의 얼굴을 벽에 전시한 프로젝트인데요. 불법으로 시작했지만 파리시는 JR의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거리에서는 미술관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


JR가 거리를 캔버스로 활용한 이유는 예술이 미술관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직접 소통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가 2007년 중동에서 펼친 프로젝트는 그의 이런 야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2013년 7월 4000평방미터의 구역을 케냐 키베라 지역의 여성 얼굴로 가득 채운 JR의 작품. 그림들은 비를 피하기 위한 지붕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 JR 팀은 매년 이곳을 방문해 지붕을 늘리고 있다.


JR는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찍고 이를 엄청나게 많이 출력해서 양측 국경지대 8개 도시 건물에 부착했습니다. 양국이 충돌할 때마다 거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죠. 이 프로젝트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JR의 명성을 높여준 계기가 됐습니다. JR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에 이르게 된 영광을 주민들에게 돌렸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영웅들은 저에게 그들의 집에 초상화를 부착하게 해준 양측 주민들입니다.”


2010년 JR는 TED 프라이즈를 수상했습니다. 이때 받은 상금 10만달러로 그는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합니다.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는 전세계 수천명의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내걸린 초상화를 통해 그들의 커뮤니티를 향해 말을 하도록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촬영한 사진을 거대한 종이에 흑백으로 인쇄할 수 있는 장치가 부착된 포토 트럭을 몰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2013년 5월 뉴욕 타임스 스퀘어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의 작업 현장.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를 하면서 JR는 뉴욕에 두번째 스튜디오를 열었고, 2013년엔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수천명의 뉴욕시민들과 관광객의 얼굴들이 타임스 스퀘어를 도배하면서 기존 광고로 가득 차 있던 타임스 스퀘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 이 광경은 당시 미디어의 큰 관심을 불러모았습니다. 1926년 타임스 스퀘어에 광고에 걸린 이래 광고가 아닌 이미지가 내걸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2014년 JR는 뉴욕 발레단과 두번째 아트 시리즈 프로그램을 협업했습니다. 링컨센터에서 열린 이 전시를 계기로 JR는 사진의 작업에 안무를 도입합니다. 역동적인 인간 동작을 구현한 작품들이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런던 메이페어에 설치된 JR 작품. 프랑스 점퍼인 파브리스 생장의 다리가 1층 창문을 통해 빠져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높이가 679cm에 달한다.

프랑스 파리 팡테옹을 4000개의 얼굴로 가득 채운 JR 작품


그해 3월엔 파리 팡테옹에 4000명의 얼굴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고, 8월엔 미국 이민 역사의 중요한 챕터를 담당한 엘리스 섬의 버려진 병원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는데 이 방문을 계기로 2015년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단편영화 ‘ELLIS’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엘리스 섬 병원을 무대로 미국을 건설한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입니다.


사라진 루브르


2016년 JR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초대돼 또 한 번 인구에 회자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아나모르포시스 기법으로 피라미드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죠. 기존 유리 피라미드와는 또다른 방식의 피라미드로 루브르는 이제 돌과 유리에 이어 투명한 피라미드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2016년 JR는 리우 올림픽을 맞아 운동 순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거대한 조각을 만들었고, 또 고지대의 빈민촌을 아이들의 눈과 얼굴 표정으로 감쌌습니다. 파리 퐁피두 센터에는 아이들을, 파리의 팔레스 드 도쿄에는 브라질 아티스트 집단 오스 게메오스와 함께 2차 세계대전 당시 도둑맞은 피아노를 모티프 삼아 전시했고, 미국-멕시코 국경에도 거대한 사진을 설치했습니다.


리우 데 자네이루 빈민촌을 아트 갤러리로 만든 JR

미국-멕시코 국경에 설치된 거대한 눈. 초대받은 사람들이 사진 위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JR의 작품에서 눈은 꿈을 상징한다.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꿈을 꾼다는 의미다.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는 이후 계속돼 26만장 이상의 포스터를 130개국에 부착했습니다. 이 기획은 모두 비디오로 녹화됐고, 온라인으로 전시됐습니다. 그중 2017년 아녜스 바르다 감독과 프랑스에서 한 활동이 바로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제작된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JR는 바르다와 함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직업을 잘 드러내줄 사진을 찍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협동심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함께 모여서 서로를 향해 두 팔을 뻗고 있는 사진을 찍고, 우편배달부는 편지를 든 모습을, 레지스탕스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을 클로즈업해 벽에 부착합니다.


포토 트럭을 타고 다니며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를 진해 중인 아녜스 바르다와 JR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단체사진을 부착한 벽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아녜스 바르다와 JR


이 감동적인 영화는 2017년 칸영화제에서 베스트 다큐멘터리상에 해당하는 ‘골든 아이(Golden Eye)’상을 수상했고, 2018년 아카데미 영화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도시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갤러리다. 나는 결코 책을 만들어서 갤러리에 제공하며 내 작품이 사람들에게 보여줘도 좋은지 결정하라고 묻지 않는다. 나는 거리의 대중과 직접 소통한다."


JR는 그 자신을 ‘도시 액티비스트(Urban Activist)’라고 부릅니다. 그는 도시 건물에 스며드는 예술 작업을 합니다. 파리 빌딩, 중동의 벽, 아프리카의 깨진 다리, 브라질 빈민촌 등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지역 주민들이 예술 작업에 직접 참가하도록 유도합니다. 브라질 빈민촌에선 아이들이 일주일 만에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는 배우와 관객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피사체(주인공)와 해석자(행인) 사이에 우연한 만남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는데 이것이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2012년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홍콩 파이낸셜 센트럴 디스트릭트 구역 풋 브릿지 위 얼굴들.


르몽드는 JR에 대해 “인간성을 드러내는 아티스트”라고 썼고, 아티스트 셰퍼드 페얼리는 “JR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장 야심만만한 거리 예술가”라고 했으며, 파브리스 부스토는 “21세기의 카르티에 브레송”이라고 말했습니다.



거대한 빌딩이 사진으로 뒤덮여 새로운 해석을 창출하는 그의 작품은 소셜미디어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그는 수백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인스타그램 스타이기도 합니다.


JR


우리가 주위에서 접하는 거대한 이미지는 거의 모두 광고와 미디어에 의해 생산된 것들로 셀레브리티나 잘 포장된 제품을 담고 있는 반면, JR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도 거대한 이미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누구나 도시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JR 작업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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