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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광고 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해 북한에 잠입,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정보요원이 있었다. 이 남자의 암호명은 ‘흑금성’.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북 공작으로 평가받았지만 어이없게도 1998년 정권교체 이후 위기감을 느낀 안기부에 의해 그 실체가 폭로돼 스파이 생활을 접어야 했다.



영화 같은 실화라고 회자되던 흑금성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군도’ ‘범죄와의 전쟁’을 만든 윤종빈 감독은 지난 2014년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흑금성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흑금성을 가장 오랫동안 취재해온 김당 UPI뉴스 기자의 도움을 받아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학창시절부터 윤 감독과 함께 작업해온 하정우 대신 이번엔 황정민이 흑금성으로 캐스팅됐고, 흑금성과 오랫동안 접촉하며 친분을 쌓아온 북한 대외경제연구원 심의처장 역할은 이성민이 맡았다. 지난 봄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첫 공개된 영화는 현지에서 호평받으며 111개국에 판매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가장 인상적인 비평은 영국의 스크린 인터내셔널에 실린 “프랜차이즈 영화의 화법은 아니지만 영리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스파이 스릴러. 말(words)은 총보다 더 강력하게 타격을 가한다”는 평이었다.



스파이 영화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누면 ‘미션 임파서블’ ‘제이슨 본’ ‘007’ 시리즈처럼 영웅 캐릭터에 기대 스펙터클로 승부하는 영화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 ‘스파이 브릿지’처럼 첩보의 세계를 진지하게 파고들면서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냉혹한 시대상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공작’은 후자에 더 가깝다.


자동차 추격전이나 화려한 무기의 나열 대신 쫄깃쫄깃한 대사와 심리전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1990년대 초중반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겉으로는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체제유지를 추구하는)과 1997년 정권교체 과정에서 흑금성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쓰이고 버려지는지 리얼하게 묘사한다.


영화는 박석영(황정민)이 안기부 비밀요원이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93년 북한이 핵을 개발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은 북한에 침투해 핵개발 정보를 빼내올 스파이로 국군 정보사령부 소령 박석영을 스카우트한다. 그의 암호명 ‘흑금성’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 뿐이다. 본인, 최학성, 그리고 대통령.



박석영은 사업가로 위장해 베이징에서 북한 대외경제연구원 심의처장 리명운(이성민)을 만난다. 박석영을 의심하는 안전보위부 정무택(주지훈)과 달리 리명운은 남한에서 온 사업가와의 협력에 적극적이다. 수년 간의 공작 끝에 리명운의 신뢰를 얻은 박석영은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 광고 사업 협력을 제안하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기주봉)을 대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1997년 대선 직전, 여당과 북측의 은밀한 거래(북풍 사건)를 알게 된 박석영은 자신이 지금까지 수행해온 일이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안기부의 조직 보호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리명운과 손잡고 북한으로 향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간첩’이라고 하면 북에서 남으로 잠입하는 경우를 뜻했다. ‘흑금성’처럼 북으로 보내진 스파이가 얼마나 더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는 스파이 공작이 그만큼 은밀하게 진행됐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1990년대까지도 뿌리깊었던 우리 사회 반공 교육의 잔재와도 관련 있을 것이다(실미도 사건이 소문으로만 떠돌다가 한참 뒤에야 실체가 공개됐던 것을 떠올려 보라).



한국영화의 경우에도 ‘간첩 리철진’ ‘은밀하게 위대하게’ ‘용의자’ 등 북한에서 온 간첩을 소재로 한 경우는 제법 많았지만, 남에서 북으로 간 경우는 ‘공작’이 처음이다.


‘최초’라는 수식어의 영광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노력이 따르는 법이다. 영화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1990년대 평양 시내를 재현한 장면을 삽입했는데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정교한 수준이다. 단지 도시 일부분의 세트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 이 비밀스러운 도시 전체를 정성스럽게 재현한 뒤 부감 카메라로 차근차근 훑어간다. 이때 극장 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감돈다.



영화는 1990년대 정치 상황의 희생양이 된 흑금성의 운명을 리얼하게 그리면서도 이를 드라마로 구성하는 과정에선 영화적인 장치를 가미했다. 리명운은 계속해서 박석영을 테스트하며 떠보는데 이 장면은 윤종빈 감독이 곧잘 최고의 영화로 꼽는 ‘대부’를 연상시킨다. 박석영이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험한 산기슭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영락없이 ‘지옥의 묵시록’에 대한 오마주다. 또 박석영과 리명운의 관계는 우정을 넘어 ‘브로맨스’로 나아가는데 이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의형제’ ‘공조’까지 한국영화가 북한을 다룰 때 곧잘 이용했던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공작’은 전개방식이 새롭지는 않지만 실화와 영화적 재미를 영리하게 결합시킨 영화다. 프랜차이즈 스파이 영화의 요란함 대신 시대상황의 엄숙함을 강조하면서도 대사의 맛과 편집의 리듬을 살려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등장인물들 모두 자신이 속한 조직의 논리를 설파하는 복잡한 첩보의 세계를 다루면서도 이를 일목요연한 스토리로 정리해 관객은 길을 잃지 않고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흑금성 실화를 사전에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영화를 보기 시작한 관객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놓치기 싫어질 것이다.


공작 ★★★☆

1990년대 숨겨진 스파이 실화. 평양 시내 완벽한 재현. 뭉클한 브로맨스.


PS) 영화도 이름따라 가는 걸까? ‘신세계’ ‘대호’ ‘검사외전’ ‘아수라’ ‘보안관’에 이어 ‘공작’까지 사나이픽처스에서 만드는 영화에는 전부 남자들만 나온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궁금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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