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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48년 7월 17일 세상에 나왔습니다. 올해 7월이면 만 70세가 됩니다. 제 인생은 40세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정신의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진정한 당신이 되라는 내면의 신호다"라고 말했는데요. 돌이켜보면 과연 제 인생도 그랬습니다.


40세 이전의 저는 변덕이 심하고 제멋대로인 청년이었습니다. 독재로 장벽을 쌓기도 했고, 내적인 투쟁 속에 숱한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때 뿐이었습니다. 여덟 번의 거친 흔들림 끝에 마흔을 맞았지요.


대한민국 헌법 필사본 (국가기록원 보관)


융을 연구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의 저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제임스 홀리스는 마흔의 위기를 '중간항로'라고 불렀더군요. 중간항로란 노예무역이 이뤄지던 시절 아프리카인들이 강제로 대서양을 횡단하던 항로를 말합니다. 홀리스는 "인생이라는 항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이끌리는 대로 살다 보면 전혀 원하지 않는 목적지에 다다른다"고 했는데요. 다행히 저는 39세 때인 1987년 제 안의 내면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하며 환골탈태한 덕분에 이전과 전혀 다른 중년을 살게 됐습니다. 오늘날 제 모습이 그럭저럭 잘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마흔의 위기를 잘 넘긴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저는 다시 한 번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칠순의 나이지만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야할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저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엔 100세 이상을 준비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고요. 세계 최고령인 제 친구 미국헌법은 올해 220살이 되었는데요. 그 동안 스물일곱 번의 추가조항을 집어넣으며 변화를 꾀했어요. 시대가 바뀌니까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죠.


저는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39세에 큰 결심을 한 이후 참으로 오랜만인데요. 그때 미흡했던 것을 보완해 '더 완숙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를 아시나요? 거기 보면 고집쟁이 할배가 요양원을 탈출해 여행하면서 과거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회고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해보려 합니다. 불과 4살 때였던 1952년부터 1987년까지 저에게 있었던 큰 변화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려드릴게요.


왜 옛날 이야기를 다시 꺼내냐고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깊을수록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나는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이 질문에 솔직한 답을 할 수 있어야 제가 원하는 진짜 저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옛날 이야기라 고리타분할까 걱정이라고요? 제가 이래봬도 신세대 할아버지랍니다. 최대한 재미있게 들려드릴게요. 그럼 옛날 옛적 저의 유년시절로 돌아가볼까요?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임시헌법의 시대


우선 제 부모님을 소개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1919년 4월 11일 태어난 임시헌장이고, 어머니는 그해 9월 11일 생인 임시헌법입니다. 태어나 보니 엄마가 임시헌법이야, 뭐 이런 경우죠. 임시헌장과 헌법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영토는 지금의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과 대통령제를 채택한다는 것을 명시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제 부모님과 저의 탄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이승만입니다. 그는 제 부모님이 태어난 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또 제가 태어난 뒤에도 또다시 초대 대통령이 되었거든요. 초대 대통령 타이틀만 두 번이라니 엄청나죠?


그러나 이승만은 1925년 제 어머니인 임시헌법에 의해 탄핵당한 적 있는데 1960년엔 저를 함부로 건드렸다는 이유로 또 쫓겨났으니 사람 욕심은 참 제어하기가 힘든가 봅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인 1948년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는 정치체제를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국회로 결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헌국회 의장이자 초대 대통령이 유력시되던 이승만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약해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으니, 나는 다 그만두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며 국회의 결정을 보이콧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죠. 결국 이승만의 요구대로 대통령제와 단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고 첫 번째 임기가 끝나갈 때쯤 이제 갓 4살밖에 안된 저를 수술대에 올립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제 유년시절 개헌의 역사를 이야기해 볼까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1952~1954 이승만 개헌


아홉 번의 개헌 역사는 대통령이 주도한 여섯 번의 개헌과 국회가 주도한 세 번의 개헌으로 나뉩니다. 대통령이 주도한 여섯 번의 개헌 중 네 번은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고 두 번은 쿠데타 후 정권 방향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개헌은 1952년 부산에서였습니다.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간선투표제, 국회 단원제이던 것을 대통령 5년 단임제와 직선투표제, 국회 양원제로 바꾼 것이 첫 번째 개헌의 골자입니다.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이 개헌에 왜 장기집권 꼼수가 숨어 있냐고요? 문제는 항상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 있는 법이죠. 이 개헌안은 무려 군대와 경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의 기립 투표로 통과됐습니다. 당시 정치 지형도를 살펴볼까요?


1950년 5월 30일 한국전쟁 직전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승만의 여당인 대한국민당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여러 정당이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당시 야당이던 신익희의 민주국민당이 대한국민당과 똑같이 24석을 얻었는데 무소속이 무려 126명으로 총 210석의 60%나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1당이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게다가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대거 낙선했으니 수족이 잘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52년 7월 4일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이 기립표결로 통과되고 있다.


국회를 통한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어렵겠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1951년 11월 30일 한국전쟁 중 임시수도로 선포한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발의합니다. 인지도 면에서는 자신이 가장 앞서는 데다가 백수가 된 수하들이라는 믿는 무기(?)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국회는 이를 부결시키더니 이듬해 아예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해버립니다. 정부는 내각제를 외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를 동원해 체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이를 '부산 파동'이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게 전쟁 와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건 아니라고 판단한 부통령 김성수가 사퇴하고, 이승만 암살 미수사건이 벌어지는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당 국회의원 장택상이 중심이 되어 정부 개헌안과 국회 개헌안을 혼합한 '발췌개헌안'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7월 4일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이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합니다.


1952년 8월 5일 직선제로 치러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국회 양원제를 도입하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1954년 11월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이 사사오입(四捨五入) 논리로 통과되자 야당 의원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두 번째 개헌은 2년 후인 1954년에 벌어진 일로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불립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인간 반올림'을 적용한 개헌이죠.


개헌의 핵심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명시한 조항 옆에 '단, 초대 대통령은 제외'라는 문구를 추가한 것이거든요. 왜 이런 개헌을 하려 했는지는 너무나 명확해 설명이 필요없겠죠? 또 개헌안에는 국무총리제 폐지, 국민투표제 확대, 국무위원 불신임제 도입, 경제정책에 대한 국가의 통제 완화 등의 조항도 담겼습니다.


그 해 5월 이승만의 자유당은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둡니다. 이제 전쟁도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당의 지원을 받으며 대통령직을 수행해보고 싶은데 1956년 대선에서 자신은 더 이상 입후보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답답했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같으면 허수아비를 내세운 뒤 그 다음 대선을 다시 노리는 꼼수를 택했겠지만 우남 이승만은 더 단순한 길을 갑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는 어느 시구처럼 헌법에 한 줄을 추가해 3선의 길을 열려고 한 것이죠.


개헌안 투표 당시 국회 지형도를 살펴볼까요? 1당인 자유당이 114석으로 5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야당은 지리멸렬해 다 합쳐도 22석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70석은 무소속입니다. 개헌에 필요한 의석 수는 전체 203석의 3분의 2인 136석입니다. 따라서 승부는 무소속 중 22석 이상을 끌어오는 것에 달렸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22석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지난 번 1차 개헌안 표결 때처럼 기립투표가 아닌 무기명 비밀투표였고, 군경도 동원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11월 27일 표결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찬성표는 135표에 그쳤습니다. 아슬아슬하게 1표 차이로 부결되는 결과였습니다. 자유당 소속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처음엔 부결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 국회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대한수학회 회장인 최윤식 교수가 반올림의 개념을 설명하더니 최순주는 개헌안에 필요한 정족수가 136명이 아니라 135명이라고 정정 발표합니다. 203의 3분의 2가 135.333인데 여기서 사람을 소수점으로 계산할 수 없으니 소수점 이하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순주가 개헌안을 가결된 것으로 정정해 통과시킬 때 그 유명한 정치깡패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이 국회 방청석에 앉아서 이 모든 상황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숭례문 앞에서 시민들이 자유 정의 진리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1960 이승만 방지 개헌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은 마침내 4선까지 해냈습니다. 장기독재에 시민들의 불만이 워낙 높았던 상황이었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부정선거가 4선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야권인사 탄압, 유령 투표용지 투입, 군경을 동원한 유권자 협박, 개표 조작 등이 자행됐습니다. 그해 4월 19일 시민들이 봉기했고 결국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이런 일이 발발한 전조는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자유당이 5석을 잃어 126석을 얻었고 민주당이 34석을 늘려 80석으로 2당이 되며 자유당을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거든요. 여촌야도 현상이 뚜렷해지며 민심이 급격하게 집권여당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하야 이후 소집된 국회는 두번 다시 이승만 독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개헌을 추진합니다. 야당의 오랜 숙원이던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도입이 개헌안에 담겼고, 대통령 5년 중임제, 국민의 기본권 강화, 헌법재판소 설치, 지방자치제 실시, 대법원장 및 대법관 선거제, 선거관리위원회 지위 강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제도화, 언론검열 금지 등을 명문화했습니다.


허정 총리가 이끄는 과도정부가 마련한 개헌안이 6월 11일 국회에 제출됐고 15일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통과됐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평화롭게 이루어진 개헌입니다.


1960년 8월 19일 총리 인준 후 장면 총리(오른쪽)와 윤보선 대통령(가운데)이 곽상훈 민의원 의장(왼쪽) 옆에서 악수하고 있다.


3차 개헌으로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이 이끄는 제2공화국이 출범합니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각계각층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요구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장면은 이승만에 맞선 4.19 혁명의 주도자가 아니라는 한계가 있었거든요. 이승만 정권에 부역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학생 시위대가 국회를 점거하자 국회는 부랴부랴 네 번째 개헌에 나섭니다.


4차 개헌의 주요 내용은 3.15 부정선거 관련자와 이승만 정권 당시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것입니다. 행위 당시 범죄가 아니었던 일에 대해 이후 새로 법을 만들어 처벌할 수 없다는 '형벌불소급의 원칙'에 예외를 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법안은 1960년 11월 29일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시민 분노에 의해 부랴부랴 이루어진 개헌은 독재자의 아집으로 만들어진 개헌만큼이나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4차 개헌은 소위 '포퓰리즘 개헌'이라며 논란이 계속됐지만 이를 관리할 정부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갔습니다.


1961년 1월 이승만 정권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설치됐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미 일본이나 지방으로 도피한 뒤여서 붙잡지도 못하고 시간만 허비합니다. 결국 이 법은 그해 5월 16일 육군소장 박정희의 쿠데타로 사문화되고 맙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박종규(왼쪽), 차지철(오른쪽)과 함께 서울시청 앞에 서 있다.


1962~1972 박정희 개헌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2년 헌법을 바꿔 제3공화국을 출범시킵니다.


다섯 번째 개헌의 골자는 의원내각제와 양원제였던 정치 체제를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직선제, 국회 단원제로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계엄사령관 장도영을 형식적인 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개헌안을 만들었고,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안이 통과됐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된 개헌입니다. 그리고 이후 헌법개정은 국민투표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못 박았습니다.


개헌안에는 인간의 존엄성 조항 신설,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 감사원 설치, 당적변경 의원 의원직 상실, 무소속 국회의원 출마금지 등이 포함됐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무소속 의원들이 자유당을 위협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조치죠. 헌법재판소도 이때 폐지됩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됐고, 1967년 재선에도 성공합니다. 그러자 또다시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한 헌법이 골칫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여섯 번째 개헌을 추진합니다.



1969년 박정희 정부가 마련한 여섯 번째 개헌안의 내용은 단출합니다. 꾸밈이 없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솔직합니다. 대통령 3선을 허용하고, 국회의원 수를 증원하며,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요건을 강화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한 마디로 대통령 계속 하게 해주고 탄핵 안 되도록 해주면 의원들 밥그릇 수를 늘려주겠다는 것이죠.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불행하게도 2차 개헌인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과 똑같은 목적을 가진 법안이 15년 만에 다시 한 번 국회에 제출됐습니다.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개헌안에 여당도 제 발이 저렸던 것일까요? 공화당 의원들은 9월 14일 새벽 2시에 국회 제3별관에 모여 기습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이 대선후보 벽보를 보고 있다.


대한민국 헌정사 최대의 치욕은 1971년 박정희가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아슬아슬하게 꺾고 3선에 성공한 이후 벌어집니다. 영호남 지역갈등의 시초가 된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주장이 모두 실현됐죠. 당선된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1인 독재 체제를 구현했으니까요.


12년 전 이승만이 4선에 성공했지만 결국 시민혁명으로 쫓겨났던 것을 기억한 박정희는 아예 시민봉기의 싹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72년 전면개헌을 추진합니다. 그는 10월 17일 긴급조치를 발동해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민의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킵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공포분위기 속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렇게 제4공화국이 출범합니다.


1972년 12월 27일 정부중앙청사에서 유신헌법 공포식이 열리고 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떴다 해서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7차 개헌의 골자는 입법, 사법, 행정의 권한을 대통령이 갖는 종신집권 체제였습니다.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제한 규정을 없앴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의 승인 없이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있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추천할 수 있으며, 국회를 해산할 수도 있습니다.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폐지해 국회의 감시 없는 정부 운영이 가능해졌고, 지방의회 구성은 통일 이후로 연기됐습니다. 대법관을 비롯한 모든 법관도 대통령이 임명권을 갖게 됐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은 심각하게 억압받았습니다. 자백의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규정을 삭제해 고문이 만연해지는 길을 열었고, 언론과 출판에 대해선 허가제와 사전 검열제를 명문화 했습니다. 군인이나 군속, 경찰공무원 등은 공무 집행 중 발생한 피해에 대해 국가에 민사상 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7차 개헌에 따라 이제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간접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임기 6년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회의원 3분의 1도 뽑습니다.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에 대해 거수기 역할을 하는 것이죠.


유신헌법 제3장에 의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주권적 수임 기관으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국민의 총의가 모인 곳"으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기관은 당시 남북이 최초로 통일원칙을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이를 구실 삼아 비정상적인 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 설립된 곳입니다.


제4공화국 내내 유신헌법에 대한 반발과 개헌에 대한 요구가 들끓었지만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선포하거나 재신임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무마하려 했습니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8대, 9대 대통령으로 연속 당선돼 무려 5선 대통령이 됐습니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결국 부하의 총탄에 생을 마감합니다.


박정희가 암살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와 전두환을 형식적으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해주는 역할을 한 뒤 1980년 해체됩니다. 대통령 간선제를 담당하는 기관은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사무처와 인적구성 및 대통령 직속 통일관련기구는 평화통일자문회의로 계승되었습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있다.


1980 전두환 개헌


박정희 사후 맞은 '서울의 봄'을 5월 18일 광주에서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는 5월 31일부터 즉시 개헌을 추진합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만든 8차 개헌안의 골자는 대통령 7년 단임제와 간접선거, 시민의 기본권 부활, 유신헌법 독소조항 삭제 등입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비례대표제 재도입, 국회의 국정조사권 인정, 구속적부심제 부활, 형사피고인 무죄추정 원칙 적용, 법관의 임명권을 다시 대법원장에게 부여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을 도모했습니다. 사회복지 의무화, 독과점 폐해 규제, 소비자 보호, 행복추구권, 연좌제 금지, 사생활 보호, 환경권 등의 조항도 신설하는 등 진일보한 측면이 있는 개헌이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전임 정부와 차별화하기 위해 새 정부를 제5공화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간접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과 국회해산권 존속 등 정치 체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 사용을 놓고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8차 개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임기 연장이나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게만은 효력이 없다"는 규정을 삽입한 것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단임제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헌법을 고쳐 재선, 3선을 한 것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미지요. 하지만 전직 대통령 예우, 국정자문회의,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등의 조항을 집어 넣어 전두환이 퇴임 후에도 권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무엇보다 대통령 간선제가 유지되는 한 전두환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시민들 역시 이런 꼼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 이승만과 박정희를 겪은 학습효과죠. 그래서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헌법에서 한 가지를 바꿀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체육관 선거'라 불린 간접선거제를 폐지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 6월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다.


1987 독재 방지 개헌


1985년 12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29.3%의 득표율로 67석을 얻으며 제1야당으로 약진합니다. 그 전에는 민주한국당이라는 제1야당이 있었지만 '어용야당'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죠.


신민당이 주축이 된 야당들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올림픽이 코앞이라 개헌 논의는 다음 정권으로 미룬다"며 호헌 선언을 합니다. 이에 야당은 물론 대한변협도 반박 성명을 내며 저항합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를 맞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합니다. 그동안 "(책상을) 탁 치니 (놀라서) 억 하고 죽었다"던 정부의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은 회견으로 이는 6월 항쟁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다음날인 6월 1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전두환과 쿠데타를 주도한 노태우를 대선후보로 지명한 것은 전국적으로 번지던 시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대학생은 물론 교수, 회사원, 공장 노동자에 성직자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옵니다. 100만 시민의 저항은 20일 이상 계속됐고, 결국 6월 29일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6.29 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인 정권 이양, 정치범의 전면적 사면과 복권, 언론의 자유 보장을 위한 제도 개선, 대학 자율화 등이었습니다.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모여들고 있다.


곧바로 불과 3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여야는 4명씩 대표단을 꾸려 8자 회담을 열었고, 여기서 개헌안을 만들어 9월 18일 발의했습니다. 이 법안은 10월 12일 국회에서 의결됐고,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29일 공포됐습니다.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가 살아 있을 때, 전두환과 노태우가 다른 짓을 하기 전에 재빨리 해치워버린 개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9차 개헌은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간 합의에 따라 국회 의결과 국민투표까지 거쳐 확정된 개헌입니다. 이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할 기틀이 마련됐고, 제6공화국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9차 개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통령 직선제입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으로 줄었고,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폐지하는 등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오던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됐습니다. 반면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부활하는 등 국회의 권한은 커졌습니다.


헌법재판소는 1960년 3차 개헌 때 설립된 후 1962년 5차 개헌 때 폐지됐다가 1987년 9차 개헌 때 부활했다.


특히 이때 재설치된 헌법재판소는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없앤 기관인데 이후 그의 딸을 청와대에서 몰아내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요. 이밖에 지방자치 확대, 최저임금제 보장,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화, 언론검열 폐지,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보장, 최저임금제 시행, 노동자 단체행동권 보장, 사회적 약자 권익 보호, 체포 및 구속 시 가족 통지 의무화 등 시민의 기본권 보장도 강화됐습니다.


또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으며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한 개헌이라 지금 헌법에는 문법상 오류도 많고, 전두환이 노후 보장을 위해 설치한 국정자문회의가 국가원로자문회의로 이름만 바꿔 살아남는 등 실책도 있었습니다. 또 대통령 5년 단임제가 과연 우리에게 맞는 옷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봉합해 버린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 젊은 시절을 돌아봤습니다. 소제목을 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진 9번의 개헌은 독재자에 의한 혹은 독재자를 막기 위한 개헌이었습니다. 국민에 의한 권력이양이 비교적 순탄하게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특정 대통령'를 위하거나 막기 위한 개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더 나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개헌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70살에 다시 한 번 창문을 열고 도전에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저의 도전 응원해 주실거죠?



유창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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