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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길더 나왔습니다. 아, 850길더요? 잠깐만요. 여기 숙녀분이 900길더 외치셨습니다. 잠깐, 저쪽 신사분이 920길더 부르셨네요. 더 없습니까? 진홍빛 줄무늬가 있는 하얀색 튤립 ‘어드마이럴 마리아’는 920길더에 팔렸습니다.”


윌렘(잭 오코넬)은 18길더에 산 튤립 구근을 며칠 만에 920길더에 팔고 뛸 듯이 기쁜 표정으로 돈을 받아 들고 마리아(홀리데이 그레인저)를 찾아간다. 윌렘은 튤립에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사랑하는 마리아와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거리에서 우연히 마리아의 옷을 입은 여자를 보게 된 윌렘은 그녀가 다른 남자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을 보고는 격분해 암스테르담을 떠난다.



그때 마리아의 옷을 입은 여자는 소피아(알리시아 비칸데르)였다. 고아원에서 자란 소피아는 수녀원장(주니 덴치)의 제안에 따라 돈 많고 나이 많은 코르넬리우스(크리스토프 왈츠)와 결혼하고 그의 아내로 살고 있었다. 어느날 부부의 초상화를 의뢰받은 젊은 화가 얀 반 루스(데인 드한)가 찾아오고 소피아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얀이 초상화 값을 튤립으로 달라는 편지를 쓰자 소피아는 하녀인 마리아의 옷을 입고 직접 튤립을 들고 얀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사랑을 나눈다.


소피아와 얀의 관계를 눈치 챈 마리아는 소피아에게 자신이 윌렘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털어놓는다. 서로 비밀을 교환하자는 마리아에게 소피아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마리아가 아니라 소피아 자신이 임신한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미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잃은 코르넬리우스는 소피아와 결혼 후 아이를 원했지만 둘 사이에선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소피아가 임신한 것으로 하면 마리아는 쫓겨나지 않고 이 집에서 계속 하녀로 살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날 이후 소피아와 마리아는 코르넬리우스를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한다.



얀과 소피아의 외도가 잦아진다. 얀은 소피아와의 미래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대신 튤립 구근 거래에 손대기 시작한다. 수녀원장이 튤립을 재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얀은 수녀원에서 구한 튤립 구근을 경매 시장에서 팔아 큰 돈을 벌겠다는 욕망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당시 튤립 버블은 이미 정점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시장이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투기 참가자들의 튤립에 대한 의구심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얀은 최고가에 팔린 기록을 가진 ‘어드마이럴 마리아’를 구해 와 사상 최대의 모험을 감행한다. 과연 최대 희귀종인 진홍빛 줄무늬를 가진 하얀 튤립은 팔릴 것인가. 또 남편을 배신하고 얀에게 가려는 소피아의 계획은 성공할 것인가. 영화는 이제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영화는 튤립 버블이 한창이던 1630년대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원사이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시대, 사랑에 '올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상 코르넬리우스는 튤립따위는 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무가치하다며 관심 두지 않고 젊은 아내만을 끔찍하게 아낀다. 소피아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젊은 화가 얀에게 빠져 남편을 배신할 계획을 세운다. 캔버스에 소피아를 그리던 얀은 문득 사랑에 빠졌음을 깨닫고는 무작정 달려간다. 여기에 윌렘과 마리아의 엇갈린 러브스토리가 소피아-얀-코르넬리우스의 삼각관계에서 씨줄과 날줄 역할을 하며 이야기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코르넬리우스의 마지막 허망한 표정, 튤립 버블 절정기 경매장에서 얀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 갈 곳 없어진 소피아가 뒤늦게 암스텔 강가에서 외눈박이 열정의 허상을 깨닫는 모습 등이 인상적인 영화다.



17세기 암스테르담 시내를 재현한 고증과 영상이 아름답고, 휘몰아치는 감정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돼 지루할 틈이 없다. 다만 이야기가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기보다는 서브플롯이나 복선이 무성의해 전체적으로 완결된 느낌이 약하다는 점은 아쉽다. 재편집 과정에서 카라 델러바인의 역할은 대부분 사라져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의 원작은 1999년 데보라 모가츠가 쓴 동명 소설이다. 영화는 원래 2004년 4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주드 로, 키이라 나이틀리, 짐 브로드벤트를 주인공으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존 매든이 감독을 맡고 드림웍스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기로 되어 있었지만 영국에서 세금 문제 때문에 결국 제작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2013년 앨리슨 오웬과 하비 와인스타인이 판권을 획득해 전혀 새로운 감독과 캐스팅으로 프로덕션이 재개된다. 감각적인 시대극 <천일의 스캔들>을 만든 저스틴 채드윅이 감독을 맡았고, <셰익스피어 인 러브>, <안나 카레니나> 등의 각본을 쓴 톰 스토파드가 합류했다. 마이클 오코너가 의상, 대니 엘프먼이 음악을 맡았고, 예산은 2500만 달러로 줄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배경이지만 실제 촬영은 영국의 켄트, 홀크햄, 틸버리 등 지방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2015년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뒤 그해 겨울 개봉 예정이었으나 2년 동안 묵혀 있던 작품이다. 완성도의 문제점을 지적받고 재편집을 거친 끝에 결국 2017년 8월 31일 런던에서 첫 시사회를 갖는다. 흥행 성적은 최악이었다. 미국에서 240만 달러, 전 세계에서 700만 달러 수익을 얻는 데 그쳤다.



로튼토마토의 신선도 지수는 고작 10%. 평가는 "독창적이지 않은 대사와 과도한 플롯.”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정도까지 욕먹을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토리 상으로 분명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2시간을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튤립 투기와 사랑의 광기를 교차편집한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무분별한 투기가 위험한 것과 달리, 사랑은 무분별할 때 더 아름답지 않던가.


크리스토프 왈츠의 연기는 이번에도 명불허전이고, 화가로 분한 데인 드한은 20년 전 <타이타닉>과 <토탈 이클립스>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는 듯 매력이 철철 넘친다.


튤립 피버 ★★★☆

광기와 열정은 한끝 차이. 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 죽음과 맞바꾼 사랑 '튤립 피버' 소피아의 결심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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