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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과연 재미있을까 우려하고 있다면 일단 걱정을 접어두자. 우리는 스포일러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반감시킨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반전이 유명한 영화인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는 결말을 알고 봐도 재미있다. 잘 만든 영화는 스토리에 짜임새가 있고 그 짜임새가 스토리에 집중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여기 스포일러가 이야기의 재미를 망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011년 비평가인 애덤 스턴버그는 스포일러에 관한 실험을 한 적 있다. UCSD 학생 800명에게 존 업다이크, 로알드 달, 애거서 크리스티, 레이먼드 카버가 쓴 미스터리 소설과 추리물을 읽게 하면서 일부 학생에겐 스포일러를 알려주었고, 일부에겐 스포일러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학생들은 스포일러가 없는 것보다 스포일러가 제공된 것을 훨씬 선호했다.(데릭 톰슨 저 ‘히트 메이커스’, 21세기북스 펴냄 참조)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탐정 에르큘 푸아로가 열차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니 결말이 스포일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쓰려고 한다.


13명의 승객에겐 모두 범인으로 볼만한 이유가 있다. 한 승객의 알리바이는 다른 승객과 연결되어 있고 그 승객의 잠재적 범행 동기는 다른 승객에게도 범행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눈사태로 멈춰버린 열차 안에서 푸아로는 조사를 거듭할수록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궁 속에 갇힌다.



푸아로는 평생 이성과 균형을 중시하며 살아온 탐정이다. 그는 한쪽 신발로 개똥을 밟으면 다른쪽 신발도 마저 밟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다. 계란 두 개가 놓여 있으면 높이가 같아야 한다. 균형은 그의 인생을 지배하는 단어다. 그에게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수사 대상이다.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그에게는 용의선상에 오른 한 명일 뿐이다. 범인은 잡혀야 하고 질서는 유지되어야 한다. 그게 푸아로가 믿는 세상이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 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1934년이다. 유럽의 한켠에선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나고, 미국에선 대공황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던 때다. 영화의 주제인 ‘한 사람을 위한 공동체의 사적 복수’는 당시 이런 시대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크리스티는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한 뒤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의 아들이 유괴돼 결국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다. 공동체의 합의가 있다면 모두에게 독이 되는 끔찍한 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설의 의도는 당시 ‘공공의 적’이었던 한 사람(히틀러)에 대한 증오와 맞물려 소설에 폭발력을 불어넣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맹활약하는 탐정 푸아로는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1920)으로 데뷔했다. 그는 셜록 홈즈와는 정반대 스타일의 탐정이다. 일단 키가 작고 벗겨진 머리에 성격은 괴팍하다. 왁스로 고정한 일자형 콧수염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홈즈처럼 직접 현장을 뛰어나니는 타입이 아니라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머릿속의 '회색 뇌세포(The Little Gray Matter)'를 사용해 추리하는 '안락의자형' 탐정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한 푸아로는 소설에서보다 훨씬 미화되어 있다. 중년 젠틀맨의 매력을 폴폴 풍기고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아마도 브래너는 푸아로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현대판 셜록 홈즈에 이은 또하나의 프랜차이즈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던 것 아닌가 싶다.



푸아로는 13명을 차례로 심문한 뒤 이 살인사건에는 이들 모두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어린이 유괴 살인범인 래칫에겐 적이 많았고, 래칫이 살해한 데이지 암스트롱은 존경받는 인사로 친구가 많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는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는, 13명의 승객과 푸아로가 마주보는 장면이 있다. 푸아로는 테이블 위에 총을 내려놓고는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 모두가 공범입니다. 이 범죄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면 한 사람을 더 죽이시오. 나는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총을 들어 푸아로를 쏘지 않는다. 13명 중 누구도 총을 들만큼 잔혹한 이는 없는 것이다. 이들은 래칫(조니 뎁)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적 복수심 때문에 범죄에 가담했을 뿐 누구도 사람을 죽일 만큼 영혼이 흔들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푸아로는 이전 대사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영혼에 균열이 간다고 말한다).



그때 한 여인이 총을 든다. 미셸 파이퍼가 연기한 허바드 부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래칫에게 유괴돼 죽임을 당한 아픔을 갖고 있다. 13명 중에서도 가장 상처가 큰 사람이다. 그녀는 총을 푸아로가 아닌 자신을 향해 발사한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장면은 소설과 영화의 주제가 함축된 장면이다. 아마도 감독이 가장 공들여 촬영한 장면일 것이다.


눈사태가 정리된 뒤 이스탄불을 출발해 런던으로 가던 열차는 중간 기착지에 정차하고 푸아로는 열차에서 내린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경찰에게 거짓 증언을 한다. 경찰은 범인이 도주했다는 그의 말을 믿어준다. 다시 13명의 승객 앞에 선 푸아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균형이 아닌 불균형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 여러분은 모두 무죄입니다.”



항상 차가운 머리로 냉철하게 판단하던 푸아로는 마지막 순간 지금껏 지켜온 자신의 원칙을 내던지기로 결심한다. 난생 처음 이성과 균형이 아닌 감성과 불균형에 자신을 내맡긴 그의 모습 뒤로 석양이 내리깔리는 마지막 장면은 여운이 오래 남는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멈춰선 순간, 결코 바뀔 것 같지 않던 한 사람의 신념도 바뀌었다. 기차는 떠나가고 푸아로는 홀로 남는다. 그에게 이집트에서 벌어진 다른 사건([나일강의 죽음]을 연상시킨다)의 의뢰가 들어오면서 영화는 푸아로가 등장하는 시리즈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디지털이 아닌 65밀리 필름으로 선명하게 담은 영상미, 영국의 스튜디오 안에 (블루스크린이 아닌) 실제로 만든 1920년대 오리엔트 특급 열차, 정성스레 재현한 당시 소품들과 풍경들, 그 안에서 개성 강한 인물들을 연기하는 화려한 배우들은 영화를 보는 경험을 즐거움으로 만들어 준다. 조니 뎁과 미셸 파이퍼를 비롯해 윌렘 데포, 주디 덴치, 조시 게드, 데릭 자코비, 레슬리 오덤 주니어, 데이지 리들리 등 초호화 캐스팅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하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우리가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음에도 왜 또다시 빠져들 수 밖에 없는지를 단박에 납득시켜주는 모범답안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

이성을 이긴 감성. 상처받은 여러분, 모두 무죄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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