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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범죄도시>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단역보다 조금 더 비중 있는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여성의 직업은 술집 종업원인데 그녀는 독사파 두목 장첸(윤계상)에게 강간당하고, 장첸의 부하 도승우(임형준)에게 얻어맞는다.


<범죄도시>


#2. 영화 <브이아이피>의 캐스팅 목록에서 여성 연기자가 맡은 배역은 죄다 시체였다. 여성시체1, 여성시체2... 이런 식이었다. 이게 문제가 되자 영화 제작사는 배역 이름을 여성1, 여성2로 바꿨지만 극중에서 모든 여성들이 고문당하고, 벌가벗겨지고, 잔인하게 살해당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3. 영화 <브이아이피>에서 채이도(김명민)는 김광일(이종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너 안 서지? 그래서 그렇게 여자들을 죽인 거지?” 영화는 김광일이 수많은 여성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이유를 이 말 한 마디로 단순화시키고 또 남성의 욕구불만으로 희화화한다.


<브이아이피>


#4. 영화 <청년경찰>에서 두 남자 주인공의 헌팅 대상이던 한 여성은 곧바로 납치돼 서울 대림동의 낡은 건물에 감금된다. 그 건물에는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난자 적출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중에는 의식 불명의 어린 소녀도 있다. 영화는 여성들의 고통보다는 두 남자 주인공의 어리바리한 코미디에 더 방점을 찍는다. 크리티컬 아우어가 지나갔는데도 두 청년은 몸을 만든다며 태연하게 고기를 구워먹는다. 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두 청년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청년경찰>


#5. 영화 <리얼>에서 여성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일관한다. 영화는 여성 신체를 과도하게 클로즈업하는데 서사 전개상 전혀 필요없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리얼>


#6.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여성은 살인의 대상이다. 김병수(설경구)가 죽이는 대상은 남녀 비율이 비슷한 데 비해, 민태주(김남길)가 죽이는 대상은 모두 여성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살해당할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영화 속 은희(김설현)는 연애를 하면서도 남자친구에게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데이트폭력의 위협에 항시 노출돼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


#7. 영화 <공조>에서 박민영(윤아)의 역할은 북한에서 온 림철령(현빈)에게 반하는 것뿐이다. 영화는 윤아라는 톱스타를 이처럼 단순한 역할로 낭비한다.


<공조>


최근 한국영화들만 나열해본 결과가 이 정도다. 이전 영화들을 살펴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여성을 모욕적으로 그리지 않고 서사의 중심에 놓고 그린 영화들도 존재한다. <박열>, <악녀>, <특별시민>, <장산범> 같은 영화들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한국영화는 여성을 모욕적으로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캐스팅조차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남한산성> <범죄도시> <프리즌> <보안관> 등) 여성들이 몰려나오는 영화는 드물다(올해 20만명 이상 관객이 든 영화 중엔 한 편도 없다).



오죽하면 베테랑 배우 문소리가 여배우들이 맡을 역할이 없다며 직접 연출까지 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를 들고 나왔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인 전도연은 책(시나리오)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고, 하지원은 한국영화가 아닌 홍콩영화 <맨헌트>에서 연기를 이어가고 있다. 김윤진은 어떻게 <시간위의 집>에 출연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캐스팅 제안이 들어온 한국영화가 이것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여배우는 오늘도>


한국영화에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시장성'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 중엔 여성의 비중이 높은데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성인 남성 배우가 나오는 영화에 더 호감을 갖고 즐겨 찾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다. 할리우드 역시 남자 배우가 더 많은 배역을 얻는 시장이었지만 최근 기류가 변하고 있다. <아토믹 블론드>, <스파이 게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원더우먼>,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고스트버스터즈> 등 여성이 극을 이끌고 가는 영화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가 변한 이유로는 '벡델 테스트'(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인지 묻는 테스트)를 통한 경각심 고취, 여성 단체의 제작사 설득, 작가와 감독들의 모험 등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요약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시장성이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시도해 봤는데 흥행도 잘 된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른 것이다.


위에 언급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살펴보면 <아토믹 블론드>의 샤를리즈 테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데이지 리들리 등 하나같이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은 단지 양성평등 관점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넘어 등장만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전혀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고 이것이 주효했다.


<아토믹 블론드>


다시 한국영화로 돌아와 보자. 앞서 '여혐' 사례로 든 한국영화들에서 여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등장하는 여성들은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묘사되거나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역할로만 한정된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신선하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는 희귀 생명체처럼 보기 드물다. 그나마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 신으로 가야만 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까지 한국영화는 여성을 혐오하는 영화를 만들 것인가? 한두 편도 아니고 대부분의 영화가 이런 식이라는 게 문제다. 이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 PD, 작가들이 대부분 남자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 부족이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브이아이피>를 제작한 워너브라더스코리아의 최재원 대표는 이 영화의 가혹한 여성 묘사 지적에 대해 “이런 논란이 계속되면 영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말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영화적 다양성을 어느 한쪽 성을 잔혹하게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홀로코스트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마초같은 제작자들이 한국영화계에 남아 있는 한 한국영화는 계속해서 <브이아이피> <범죄도시> 같은 시대착오적인 영화들만 양산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화적 다양성을 해치는 길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영화 제작자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또 관객은 흥행 스코어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신호를 보내줘야 한다. 여성혐오 영화인 것을 알면서도 봐주는 관객이 있는 한 한국영화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범죄도시> <브이아이피> <청년경찰> 같은 영화를 깔깔대며 본 뒤 나중에 돌아서서 욕하기란 여간 낯뜨거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범죄도시> 시사회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필자는 많은 관객들이(여성 관객들마저) 이 영화를 좋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마동석은 슈퍼히어로처럼 듬직하고, 윤계상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악한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맞대결에서 영화적 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힘으로 밀어붙이는 이 영화가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선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 이 영화 개봉 후 <브이아이피>가 촉발시킨 여혐 논란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영화는 언제까지 여성을 혐오할 것인가. 우선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 카메라에 담을 때, 편집할 때 ‘젠더’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관객도 나쁜 영화를 과감하게 보이콧하고, 좋은 영화를 발굴하고 더 많이 봐주며 응원해야 한다. 관례적으로 그렇게 해왔다는 이유로 한쪽 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영화는 시장에서 매장당해야 비로소 영화 제작자들도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될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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