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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재현하거나 선언하는, 자전적인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왜곡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내 작업 방식은 내 안의 개인적인 디테일을 모아서, 그걸 자유롭게 배열하는 것이다. 나와 가까운 디테일을 가져오는 이유는 나로 하여금 진실해야 한다는 무게감을 주기 때문이다." - 홍상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2개의 챕터로 나뉘어진 영화에서 25분가량 진행되는 1부는 독일 함부르크가 배경이고, 1시간 10분 남짓 진행되는 2부는 강릉이 배경입니다.


1부에서 영화배우인 영희(김민희)는 함부르크에서 친한 언니(서영화)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며 치유의 시간을 보냅니다. 유부남 영화감독과의 불륜이 대중에 공개된 이후 그녀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습니다. 영희는 언니의 외국인 친구 폴의 집에 초대돼 함께 밥을 먹기도 하고 우연히 서점에 들러 악보 책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2부에서 영희는 강릉의 독립영화관에서 선배들(권해효, 정재영, 송선미)을 우연히 만나 오랜만에 함께 술을 마십니다.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영희에 관한 소문이 화제에 오르고 영희는 “다들 사랑할 자격이 없다”며 화를 냅니다. 울적해진 영희는 바닷가에 나가 모래사장에서 잠이 드는데 마침 강릉에 와 있던 조감독(안재홍)이 찾아오고 불륜 관계였던 감독(문성근)을 다시 만납니다. 스태프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영희와 감독은 괴로웠던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영화는 배경이 되는 두 도시에 대한 설명으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소개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도시에서 영희는 외롭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늘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혼자 있다고 느낍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면서 홍상수와 김민희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이 김민희의 입장에서 그녀가 겪었던 감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입니다. 그녀가 “사랑할 자격도 없다”거나 “다들 한가한가봐. 왜 그렇게 남 이야기를 해” 혹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할 때 그동안 쌓여 있던 울분을 털어놓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불륜이 공개됐을 때 홍상수 감독이 언젠가 이 소재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또 이렇게 적나라하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홍상수답다고 할까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기존 홍상수 영화와 많이 다릅니다. 감정이 담긴 영화입니다. 기존 홍상수 영화는 제3자의 입장에서 관조하는 듯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저 꼬라지 봐라. 웃기지 않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감독이 관객과 함께 비웃는 듯한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감독이 배우의 편에 서 있다는 게 눈에 보입니다. 영희의 편에서 영희의 말을 들어주고, 영희의 응석을 받아주고, 또 영희에게 힘내라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감독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지금까지의 홍상수가 쿨한 홍상수였다면, 이번엔 뜨거운 홍상수라고 할까요?




영희를 둘러싼 인물들인 권해효, 송선미, 안재홍 등은 모두 영희를 걱정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편이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영화는 등장인물과 영희의 관계를 차곡차곡 설명하고는 이들과 술자리 장면을 두 번 보여주는데 이 두 번의 술자리는 영희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한 번은 김민희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을 번갈아 보여주는 롱테이크, 또 한 번은 문성근과 김민희를 번갈아 보여주는 롱테이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자에서는 김민희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느꼈던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고, 후자에서는 김민희와 문성근이 자신이 가슴에 담고 있는 상처를 고백합니다. 관객을 향해 우리 이야기를 제발 들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해변에서 잠든 영희는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영화는 이 순간을 영희의 시점에서 거의 1인칭으로 보여줍니다. 안재홍이 다시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요. 걱정했어요.” 그러자 영희는 “저는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뚜벅뚜벅 해변을 걸어갑니다. 이렇게 주인공의 강한 의지를 강조하는 홍상수 영화를 저는 본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가히 사랑의 힘으로 만든 엔딩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사랑은 감독의 영화 스타일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해준 작품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변화는 놀랍고 또 신선합니다. 감정이 날선 그대로 살아 있어서 영화에 빠져들게 됩니다. 최근 홍상수 영화들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표피적이었고 또 지식인의 위선이라는 비슷한 주제 역시 동어반복해 식상하다고 느껴왔는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그의 영화세계에서 이정표에 가까울 정도로 변화를 꾀한 작품이어서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진실한 감정을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 것처럼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야기 구조를 엇갈리게 배열해 장난치는 것도 자제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진심으로 승부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생의 변화가 곧 창작을 대하는 태도마저 달라지게 했군요.


영희가 자기 자신으로 느껴져 연기하기 불편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과감하게 표현해낸 김민희 역시 놀랍습니다. 이토록 재능있는 배우를 이렇게 홍상수 영화에서만 봐야한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극중 영희의 대사처럼 "여러 작품을 검토"하게 되는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

위선을 버리고 진심을 담은 홍상수.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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