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리 흑인은 세상 어디에나 있어. 어떤 노파가 이렇게 말하더라. 달빛 아래 흑인 소년은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마이애미에 사는 샤이론은 말수가 적은 흑인 소년이다. 학교에선 왕따를 당해 숨어 지내고 엄마는 남자친구와 마약에 빠져 있어 집에 가는 게 싫다.



늘 혼자인 샤이론에게 두 남자가 다가온다. 후안 아저씨와 유일한 친구 케빈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바닷가에서 수영을 가르쳐주며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나아가야 해. 아무도 네 결정을 대신 해주지 않아."



케빈은 학교에서 호모 같다고 놀림받는 샤이론에게 "넌 충분히 강하다"며 '블랙'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푸른빛 달이 뜬 밤 해변에서 샤이론은 케빈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날 해변에서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은 두 사람을 서먹하게 만든다.


22일 개봉한 영화 <문라이트>는 흑인영화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인종차별, 저항, 범죄, 랩 등은 부차적이고 영화는 샤이론의 내면에 천착한다. 마약중독자 엄마를 둔 왕따 소년 샤이론의 세계는 부서지기 쉬울 만큼 연약하다. 영화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아련한 푸른 조명으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샤이론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영화는 샤이론의 소년기, 청소년기, 성년기 등 세 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다. 각 챕터에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모두 샤이론을 지칭하는 서로 다른 이름이다. 유약함에서 벗어나 더 강해지고 싶은 그는 성장 단계마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 그래서인지 세 챕터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3인 1역으로 샤이론을 연기하는 세 배우의 체격, 이미지, 연기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화면의 질감도 달라 챕터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하다. 감독은 세 배우가 아예 만나거나 연락하지 않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변화를 꾀했다.



샤이론은 감독 배리 젱킨스와 원작자 타렐 알빈 맥크레니의 반자적적인 모습이 담긴 캐릭터다. 두 사람 모두 마이애미 빈민가 출신 흑인에 엄마는 마약중독자였기에 이 영화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맥크레니는 2003년 [달빛에서 흑인 소년들은 푸르게 보이네]라는 희곡을 써 무대에 올렸고, 이를 눈여겨본 젱킨스는 데뷔작 <멜랑콜리의 묘약>(2008)으로 호평받으며 영화감독이 된 후 13년 만에 맥크레니의 희곡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가 흑인영화의 전형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도 흑인들의 세계를 절절히 포착해낸 것은 이처럼 만든 사람의 진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챕터에서 샤이론과 케빈의 만남은 원작 희곡에 없지만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다. 원작이 엄마와의 화해가 주된 테마였다면 영화는 샤이론의 성 정체성 문제를 파고든다. 유년기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샤이론의 내면은 황폐화되어 있다. 음식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설정은 그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성인이 된 샤이론은 근육질 몸매에 어릴적 자신을 돌봐준 후안처럼 성장해 있다. 하지만 몸은 강해졌어도 샤이론의 여린 내면은 그대로다. 마약재활원에서 엄마를 만나고 온 어느날, 케빈이 10년 만에 전화를 걸어 오고 그날밤 샤이론은 몽정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재회한다.


<문라이트>는 스스로 빛을 내며 타오르는 영화는 아니다. 달빛에 비친 눈물처럼 내밀한 감수성으로 조용히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다. 불우한 환경에 놓인 한 유약한 소년이 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힘겹게 뒤로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영화는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 소년이 숨겨온 상처를 드러내는 대신 영화는 가만히 등을 토닥거리며 기어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 샤이론의 눈가에 촉촉히 맺힌 눈물에 이어지는 푸른 달빛 아래 서 있는 흑인 소년은 보는 이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얇은 유리막처럼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성장기를 거쳐온 것은 비단 샤이론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발버둥칠 때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것은 결국 사랑 아니었던가. 부디 이 영화를 만나는 행운을 놓치지 마시길.



<문라이트>는 2016년 9월 텔룰라이드 영화제에서 첫 공개돼 그해 최고의 영화라는 호평을 받은 이후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무려 15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골든글로브 영화상에선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영화상엔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편집상, 촬영상, 음악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영화를 제작한 브래드 피트의 '플랜B'는 <노예 12년> <셀마> <빅쇼트>에 이어 4년 연속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저력을 보여줬다. 제작비 500만달러 대비 2천200만달러 수입으로 흥행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문라이트 ★★★★☆

푸른 달빛 아래 흑인 소년의 성장담. 영화로 쓴 시.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