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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 두 편이 있습니다.

최근 우연히 보게 됐는데요. 참 좋은 영화들인데 한국에선 개봉 일정이 잡혀 있지 않더군요.

극장 개봉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화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1. 여행의 끝 The End of the Tour



제목처럼 여행을 그린 로드무비이면서 남자 두 명의 버디무비,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좇아가는 철학이 담긴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남자에 대해 소개해야 합니다.


한 남자는 데이비드 립스키로 [롤링 스톤]지의 기자 겸 소설가입니다.

또 한 남자는 우리 시대의 토마스 핀천 혹은 존 어빙으로 추앙받는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레스입니다.



월레스는 1996년 출간한 두번째 소설 [무한 희롱(Infinite Jest)]으로 극찬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 소설은 [타임]지가 20세기 100대 영문소설로 선정하기도 했는데요. 무려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와 함께 '인터넷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낯설다고요? 한국에 아직 번역된 적 없기 때문입니다. 월레스는 3권의 소설을 남겼지만 하나도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무한 희롱]의 경우 번역 시도는 매번 좌절되곤 했는데요. 그 이유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거의 요약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요. 이 소설에 대한 소개글을 참고로 대략적으로 윤곽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반다나가 트레이드 마크인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레스.


미국와 캐나다가 북아메리카 합중국으로 통합된 미래, 테니스 선수를 길러내는 사립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 학생의 아버지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무한 희롱>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입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보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어때요? 황당하죠?


이런 기본적인 구성이 시간순이 아닌 뒤죽박죽으로 전개되는데 스토리 중간중간에 미분 정리, 단편소설 분량의 주석, 마약 의약품에 대한 세세한 설명 등 이것저것 잡다하게 끼어듭니다. 그래서 독자가 책에 중독되지 못하도록 하는데요. 이 책을 극찬한 독자와 평론가들은 이 책의 매력을 말이 되든, 되지 않든, 꾸역꾸역 끝까지 읽게 되는 힘에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무한 희롱]은 '힙스터'들을 위한 책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만, 정작 월레스는 힙스터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월레스는 담배, 술, 섹스뿐만 아니라 TV, 음악, 영화, 문학 등이 현대인들을 수동적으로 고립시킨다고 봤습니다. 그는 '아이러니'와 '힙'하다는 것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TV와 영화 속에서 쿨하고 힙한 인물들의 아이러니컬한 대사들은 관객이 스스로를 등장인물과 동일시하게 하도록 만드는데 이로 인해 중독성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러니는 응급방편책일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아이러니'는 새장에 갇힌 이가 그 우리에 만족하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월레스의 문화 중독성 개념의 리스트에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모바일이 추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월레스가 2005년 미국 캐니언대학에서 한 졸업연설문은 번역돼 [이것은 물이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아래 문장을 통해 월레스의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른바 ‘진짜 세상’은 여러분이 디폴트세팅을 바탕으로 사는 것을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남성과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진짜 세상’은 공포와 경멸, 좌절과 갈망 그리고 자기숭배를 연료로 쓰면서 잘 굴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문화도 이런 경향을 동력화해 엄청난 부와 편의 그리고 개인적 자유를 산출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 [이것은 물이다] 123~130쪽


자,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와볼까요?



영화는 실제 립스키가 2010년 펴낸 회고록 [Although of Course You End Up Becoming Yourself]를 각색했습니다. 월레스는 2008년 46세를 일기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립스키는 그의 부고를 듣고 12년전 그와의 만남을 회상해 책을 펴낸 것입니다.


데이비드 립스키는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기하고, 데이비드 포스터 월레스 역은 제이슨 시겔이 맡았습니다. 아이젠버그 특유의 살짝 어리숙하고 상대를 숭배하는 표정은 립스키가 월레스를 대하는 태도와 잘 어울립니다. 시겔은 삶이 귀찮은 듯 냉소적인 느낌을 잘 표현해내고 있고요.



영화가 시작하면 립스키는 [무한 희롱]이 엄청난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월레스에게 북클럽 투어 동행 취재를 제안합니다. 뉴욕의 립스키는 시카고에 사는 월레스를 찾아가 함께 미네아폴리스 여행을 다녀옵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5일간의 여정을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당시 월레스는 34세였고, 립스키는 30세였습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집과 여행지에서 나누는 인터뷰를 빙자한 대화가 거의 전부입니다. 주제는 여자, 소설, 마약, 성공과 실패, 술, 담배, 개, TV, 음악, 영화, 아이러니, 우울증, 외로움, 고독, 부끄러움, 자유 등으로 두 사람은 다방면에 걸친 대화를 나눕니다. 그 과정에서 마치 록스타를 뒤쫓듯 립스키는 월레스의 생각을 알기 위해 안달하기도 하고, 나중엔 여자에 대한 의견 차이로 싸우기도 합니다.



영화는 고독한 남자의 완고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줍은 남자의 자신에 대한 몰두에 대해 이야기하며, 45살 미만의 남자가 1000페이지 소설을 읽을 때의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공허한 순간에도 빛납니다. 두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TV만 보고 있는 장면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문화의 자산들이 자꾸만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디폴트 모드가 협동에서 점점 고독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월레스의 통찰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즈와 가디언 등은 이 영화를 '2015년 베스트 10' 중 한 편으로 선정했습니다.



2. 엘비스와 닉슨 Elvis & Nixon



아마존 스튜디오가 만든 이 영화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섀넌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케빈 스페이시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연기합니다.


지구상 가장 유명한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약단속국의 비밀 요원이 되는 것입니다. 흔한 홍보 요원이나 고문 같은 것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진짜 비밀 요원으로 멋지게 활약하는 것이 그가 꿈꾸는 것입니다.


그는 백악관을 찾아 닉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비서들은 처음엔 진짜 엘비스인지 의심하다가 진위를 확인한 뒤엔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을 주선하는데요. 백악관과 엘비스가 밀당을 벌이는 과정에선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비웃으며 코믹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비서는 젊은층의 투표를 독려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고지식한 닉슨은 연예인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만남을 거절합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과연 두 사람이 만날까 만나지 못할까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러닝타임을 할애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두 사람은 운명적인 단 한 번의 만남을 갖게 되는데요. 이 영화의 백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보다도 두 사람의 만남 그 자체에 있습니다.


호랑이와 사자가 만난 것처럼, 혹은 악어가 물에서 올라와 뿔 빠진 코뿔소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영화는 그 공기를 스릴 넘치고,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잡아냅니다.


겉으로 보이는 미국 대통령의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엘비스는 팝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만남을 이끌어갑니다. 이 과정을 보고 있으면 엘비스의 매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마이클 섀넌의 외모는 실제 엘비스 프레슬리와 닮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대통령처럼 권위적인 직함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 보면 좋을 영화입니다. 참, 케빈 스페이시 역시 닉슨과 닮지 않아 우려했었는데 기우였습니다. 그의 연기는 이번에도 역시 최고입니다.


닉슨과 엘비스의 실제 만남.


두 편의 작지만 아름다운 미국영화가 한국에서도 곧 선보이길 기대해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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