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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가 스크린을 싹쓸이하고 있는 봄 극장가에 토속적인 이름을 가진 영웅 한 명이 나타났다. 족보는 500년 전 연산군 시절까지 올라가지만 나쁜 놈을 벌준다는 목적과 이름만 같을 뿐 딱히 비슷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남자. 게다가 정의감 넘치는 듬직한 영웅이 아니라 자비도 없고 친구도 없는 소시오패스인 이 남자의 이름은 탐정 홍길동이다.


영국에서 ‘셜록 홈즈’가 현대판 소시오패스로 새롭게 태어나고, 미국에서 배트맨이 반영웅 ‘다크 나이트’로 재탄생한 것처럼, 한국의 대표 도적 두목 홍길동이 정확한 시대를 알 수 없는 한국 근현대를 배경으로 불법 흥신소 탐정이 되어 돌아왔다.



4일 개봉한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한 마디로 <씬 시티>와 <셜록>을 합쳐놓은 것 같은 영화다. 배경과 카메라 구도는 영락없이 <씬 시티>를 빼다박았고, 사건을 추적하는 홍길동 캐릭터는 ‘셜록’을 연상시킨다. <씬 시티>는 ‘다크 나이트’를 창조한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필름 느와르 스타일로 만든 영화로 <탐정 홍길동>에서 자동차가 달리는 장면이나 액션 장면 등에서 <씬 시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영화가 공개되기 전엔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았다. <씬 시티>와 지나치게 유사한 장면들이 예고편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공개된 영화는 <씬 시티>의 이미지와 스타일을 차용하긴 했지만 이야기 구성까지 따라하지는 않았다.


<씬 시티>는 부패와 범죄로 가득찬 도시에서 거침없는 복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려는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다. 권력자인 악당과 관능적인 여인 등이 물고 물리는 복수극을 펼친다. 이에 반해 <탐정 홍길동>은 선과 악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한 드라마다. 또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했던 <씬 시티>의 캐릭터들과 달리 어느 정도 감정도 묻어난다. 달기만한 미국식 팝콘을 우리 입맛에 맞게 적절히 개량했다고 할까?



<씬 시티>와 <셜록>을 따라했으면서도 <탐정 홍길동>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린 조성희 감독의 무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순수 판타지. <씬 시티>의 관능적인 여인 대신 동이(노정의)와 말순(김하나)이라는 두 여자 어린이를 등장시켜 외로운 탐정 홍길동과 순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이는 여성들을 위한 순수 판타지 <늑대소년>(2012)으로 660만 관객을 불러모은 그다운 선택이다.


조 감독은 단편영화계 스타 감독이던 시절, 어린 남매가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단편영화 <남매의 집>(2008)으로 각종 영화상을 휩쓴 적 있다. 이때의 장기를 살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아동 판타지)과 하고 싶은 것(반영웅 탐정)을 연결해 <탐정 홍길동>을 새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마케팅 측면에선 비정한 안티히어로에 순수한 어린이를 매칭시켜 남성과 여성 관객을 둘다 잡겠다는 복안이기도 하다.



둘째, 반전 매력. 안티히어로인 홍길동에 여린 소년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씬 시티>의 주인공 브루스 윌리스와 미키 루크,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캐릭터지만, 홍길동 역을 맡은 이제훈은 다르다. 극중 홍길동은 어릴 적 사고로 좌측 뇌 해마에 손상을 입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밝히지만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만나 감성적인 이미지를 얻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제훈은 <시그널>의 갈등하는 형사 혹은 <건축학개론>의 소심한 대학생이다. 무자비한 서양식 반영웅이 아닌 여린 소년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반전 매력을 끌어냈다.



셋째, 시대 불명. 조 감독은 프로덕션 디자인에 세세하게 공을 들여 시골 마을을 시대와 국적이 불분명한 장소로 꾸몄다. 영상미를 중시하는 조 감독은 데뷔작 <늑대소년>을 뽀샤시한 필터로 찍어 송중기를 스타로 만든 적 있다. 그는 <탐정 홍길동>을 만들기 전 아예 꼼꼼하게 컨셉 아트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 결과, 영화의 배경은 토속적인 한국의 시골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디자인이나 건물 등은 마치 1960년대 미국 탐정영화의 배경처럼 보인다. 익숙하지만 왠지 낯선 느낌을 줌으로서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이도록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컨셉 아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컨셉 아트


조성희 감독의 두번째 영화 <탐정 홍길동>은 <씬 시티>의 비정함과 <늑대소년>의 순수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그는 홍길동이라는 고전 캐릭터를 가져와 국적 불명의 안티히어로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물은 꽤 흥미롭다. 영상미가 훌륭하고 독특한 캐릭터에 유머까지 곁들여 <캡틴 아메리카> 못지않게 유쾌한 2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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