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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노아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신선한 책입니다. 빅 히스토리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때만큼이나 시각이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기원부터 이들이 새로운 종으로 대체되어 사라질 미래까지, 그러니까 자신이 속한 사피엔스라는 종의 큰 그림을 58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에 담고 있습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사피엔스는 20만년의 역사 동안 세 번의 혁명을 겪었습니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그것입니다.


인지혁명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다른 호모들과 사피엔스를 가른 기준입니다. 사피엔스에겐 우연하게도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가 있었고, 그 돌연변이는 언어 능력을 발달시켰습니다. 사피엔스는 수학이라는 언어를 발명했고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알았습니다. 이를 무기로 사피엔스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결국 자기보다 두뇌도 크고 힘도 더 센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킬 수 있었습니다.



농업혁명은 수렵채집인으로 살아온 사피엔스의 본성과 맞지 않는 선택이었습니다만 조직 우두머리의 무덤을 성대하게 짓기 위해 노동자들을 먹일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땅을 갈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이후 정착 생활이 뿌리내렸습니다.


과학혁명은 인간의 무지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그전까지 중세인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코페르니쿠스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인간의 무지를 인정했고, 그 때문에 더 큰 발견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과학은 언제든 새로운 이론에 현재의 권위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이런 태도는 사피엔스를 급속하게 지식의 발견으로 이끈 힘입니다.



저자는 문화, 돈, 종교, 제국, 자본주의, 자유주의, 행복 등 오늘날 사피엔스를 있게 한 여러 가치에 대해 서술하는데 그 시선이 독특합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에 대해 하라리는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또하나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과학혁명 이후 자본은 자원이 아닌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전쟁의 수익성이 예전만 못해졌고 따라서 인적 교류를 위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낳았는데 이는 현대 소비사회에 검약이 아닌 소비가 선이 되면서 만연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부로 인한 행복은 소외된 개인이 잃어버린 행복으로 상쇄되면서 결국 현대 사피엔스는 과거 사피엔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라리는 주장합니다.


그는 행복에 대해 세 가지 관점을 말합니다. 첫째, 세로토닌, 도파민, 옥사토신 등에 좌우되는 생물학적 쾌락, 둘째, 사회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 셋째, 주관적 느낌이 아닌 감정의 덧없음을 인정하고 갈망을 멈추면 찾아오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피엔스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고 있는 존재일까요? 사피엔스는 그전까지 5억년 간 살아온 지구 상의 다른 종들을 99% 멸종시켰는데 그렇다면 사피엔스의 행복은 다른 종들을 멸종시킨 뒤에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저자는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개인의 행복의 역사야말로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공백으로 남아 있는 미지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 교수 유발 노아 하라리


이처럼 거대한 질문 뒤에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미래를 3가지로 예견합니다. 3가지 미래 모두 지금까지의 사피엔스는 사라지고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탄생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마침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큰 관심을 얻고 있는 요즘, 하라리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알파고는 사피엔스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육체와 지능에서 인공지능에 밀리게 될 인간은 언젠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기계와 결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피엔스] 마지막 장에 실린 하라리가 예견하는 3가지 사피엔스의 미래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네안데르탈인


1. 유전자 변형 사피엔스


첫번째 가능성은 생물학적 조작에 의한 사피엔스의 변형입니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벌레의 수명을 여섯 배 늘릴 수 있고, 바람피지 않고 한 암컷하고만 짝짓기하는 쥐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또 암에 걸리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고, 기억력이나 시각 등 특정 능력이 더 극대화된 장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한 연구팀은 멸종된 매머드의 유전자 지도를 해독하고 코끼리 수정란에 매머드의 DNA를 삽입해 인공수정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무려 5천년 만에 매머드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연구팀은 멸종된 네안데르탈인을 복원하겠다고도 합니다. 만약 성공하면 3만년 만에 네안데르탈인 아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라리는 이를 진화론자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승리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인간이 신처럼 원하는 생명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사이보그


마샬 매클루언은 미디어는 신체의 확장이라고 했습니다. 즉, TV는 시각의 확장이고, 라디오는 청각의 확장이며,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 컴퓨터는 두뇌의 확장입니다. 하라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즉, 지금 사피엔스가 갖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TV 같은 온갖 기기는 신체와 결합하기 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미래까지 길게 놓고 본다면 이 시기는 머지 않아 끝나고 인간은 더 강력한 팔, 높이 점프할 수 있는 다리, 가상현실을 즉시 재현하는 안구를 갖게 될 것입니다.


사이보그는 이미 장애인 재활 연구에서 시작됐습니다. 시각 장애인에게 조금이라도 시력을 되찾을 수 있게 하는 망막 임플란트가 개발 중이고, 뇌 신호로 움직이는 인공 팔과 다리는 이미 만들어져 쓰이고 있습니다. 몸 전체가 마비된 식물인간도 앞으로는 뇌에 전극을 심어 뇌의 정보를 수집해 외부세계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발전하게 될 사이보그의 화룡점정은 두뇌와 컴퓨터의 연결입니다. 사이보그는 뇌를 하드디스크에 카피하거나 반대로 하드디스크의 내용을 뇌에 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드디스크를 또하나의 사피엔스라고 부르고 윤리적으로 존중해주어야 할까요? 또 하드디스크가 두뇌에서 추출한 감정을 하나의 데이터로 저장하게 되면 그 감정은 다른 두뇌로 복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나의 감정은 복사본을 저장한 다른 두뇌의 감정과 어떻게 구별될까요?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과연 나만의 것일까요? 아니, 감정이라는 게 더 이상 주관적인 개념일 수 있을까요? 만약 사이보그가 더 이상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사피엔스의 진화된 형태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종일까요? 이런 문제가 남습니다.



3. 인공지능의 진화


진화하는 인공지능의 가장 초기적인 형태는 바이러스입니다. 생명체의 최소 단위인 박테리아가 스스로 복제하며 퍼져 나가는 것처럼 바이러스 역시 네트워크를 타고 스스로 복제하며 진화합니다. 하라리는 인공지능을 프랑켄슈타인에 비유합니다. 앞의 두 가지 미래는 사피엔스가 확장하는 개념이었다면 인공지능은 사피엔스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되어 괴물을 창조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런데 하라리의 관점은 통상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어떻게 인간에 도움이 되게 쓸 수 있을까?" 이런 식이 아닙니다. 하라리의 관점은 오히려 사피엔스 이후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래서 새롭습니다.


그는 사피엔스가 인공지능을 창조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말합니다. 정치, 사회적 규제가 이를 지연시킬 수는 있겠지만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피엔스는 대체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새롭게 탄생할 인공지능, 그러니까 사피엔스가 만든 피조물에게 사피엔스가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느냐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자유주의 등 첫번째 강인공지능이 갖게 될 가치관이 그들이 앞으로 만들어나갈 세계를 결정짓는다고 말합니다. 지금 사피엔스가 갖고 있는 아담과 이브 혹은 천지창조 신화 같은 것처럼 말이죠.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의 결합으로 탄생한 초인공지능을 그린 영화 <트랜센던스>


[사피엔스]를 읽고 나면 저자의 폭넓은 지식과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 지식을 이런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조합할 수 있는지 경이롭습니다. 저자가 사피엔스라는 종에 대해 갖고 있는 시선은 굉장히 시니컬합니다. 무엇을 위해 왜 살아가는지 모르면서 지구의 자원을 계속해서 낭비하고 스스로 파멸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종이 바로 사피엔스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는데는 유능하지만 이를 행복으로 전환하는 데는 미숙한 종입니다.


저자는 지금이야말로 사피엔스가 가장 평등한 예외적인 시기라고 말합니다. 역사 속 어느 시기에도 사피엔스는 개체 간 평등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비록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말로만이라도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피엔스에게 위의 세 가지 미래가 닥치고 나면 사피엔스의 능력은 빈부 격차보다 더 심각하게 차이가 벌어질 것입니다. 아이언맨이 된 사피엔스는 죽음을 없애버리려 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길가메시'처럼 불멸하며 영생을 얻을 것이고, 가난한 사피엔스는 장기를 팔면서 양계장의 닭처럼 좁은 방에 갇혀 환각 상태에서 피를 빨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입니다. 저자는 책을 마치는 마지막 문장에서 결론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 대신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를 질문해야 한다."


하라리의 예견처럼 미래가 흘러갈까봐 두려운가요? 하지만 저는 책을 덮으면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이 더 커졌습니다. 그것은 저자가 개괄적으로 탐구한 사피엔스라는 종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토록 막무가내로 마치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가는 레밍스처럼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전진하기만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피엔스가 여기까지 온 것은 지구상에 이 호기심 많은 종이 등장한 이래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니었을까요? 만약 사피엔스가 실패해서 결국 멸종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주 전체로 보면 지구라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작은 곳에서 겨우 수십만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작은 사건일 뿐입니다. 이 정도 실수는 우주에서 한 번쯤 시도해 볼만한 일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미래를 겁낼 이유야말로 아주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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