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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 흥행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놓치기 아까운 작품 5편을 모았다. 각각 색다른 매력이 있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다. 아직 보지 못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챙겨보시길.



1. 러브 앤 머시


한마디로: 천재 뮤지션 브라이언 윌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음악영화.

타임지와 롤링스톤즈지 선정 2015년 베스트 영화.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0%.


영국 출신 비틀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1960년대, 미국엔 비치 보이스가 있었다. 비치 보이스는 ‘Surfin' USA’ 같은 신나는 해변 팝송으로 유명하지만 로큰롤 음악사에 길이 남을 혁신적인 음반 ‘Pet Sound’를 만들기도 했다. 이 음반은 밴드의 리더이자 작곡가인 브라이언 윌슨의 솔로 프로젝트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천재였던 그는 비틀즈를 넘어서기 위해 밴드의 월드투어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작곡에 집중했다. 자유분방한 오케스트레이션 뿐만 아니라 자전거 종소리, 개 울음소리, 사람들 떠드는 소리 등을 음향 효과로 사용해 이전과 전혀 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영화는 윌슨이 독보적인 집중력으로 20세기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음반을 만드는 과정과 시간이 흐른 후 그가 가짜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고 주치의에게 감금당했을 때 한 여자가 사랑의 힘으로 그를 구해내는 과정을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폴 다노가 젊은 윌슨, 존 쿠색이 나이 든 윌슨, 엘리자베스 뱅크스가 훗날 윌슨과 결혼하는 멜린다 역을 맡았다.


영화는 스토리보다 천재의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 그 심리묘사에 주력한다. 윌슨의 음악에 마음을 열고 보면 더 감동적이다. 영화 제목인 ‘Love and Mercy’는 브라이언 윌슨의 1988년 솔로 데뷔 앨범 오프닝 트랙 제목으로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실제 윌슨이 이 노래를 부르며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 와일드 테일즈: 참을 수 없는 순간


한마디로: 아르헨티나에서 온 6개의 단편모음집. 크고 작은 ‘욱’하는 상황을 재치있게 묘사한 블랙코미디.

201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2014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6%.


답답한 머릿속을 시원하게 해줄 재기발랄한 블랙코미디가 보고 싶다면 당장 이 영화에 올라 타라. 열받는 상황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방식이 독특하면서도 후련하다.


대략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하나. 비행기를 탔는데 승객들이 모두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안 좋은 인연으로 얽혔다면 얼마나 불안할까? 이야기 둘. 한적한 도로에서 아우디를 몰고 가는데 고물차 한 대가 자꾸만 깐족대며 추월을 방해한다. 욕을 날려주고 도망가는데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나 차가 멈춰선다. 그때 고물차에서 덩치 큰 운전자가 내리더니 걸어오는 게 백미러로 보인다면? 이야기 셋. '금수저' 집안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친다. 아버지는 정원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감옥에 대신 다녀오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이야기라고? 여기선 다르다. 정원사는 요구 조건을 계속 올리고 열받은 아버지는 더이상 거래는 없다고 선언한다.


이런 식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이야기 여섯 편이 담겼다. 아르헨티나 영화 역사상 최대 흥행작이다.



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한마디로: 멕시코 거대 범죄 카르텔의 보스를 잡기 위한 미국 CIA의 비밀 작전을 그린 스릴러.

2015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3%.


'생지옥'이 있다면 아마도 멕시코의 국경도시 후아레즈 아닐까. 치안력 부족으로 외부 출입이 통제된 이 도시 곳곳에선 밤마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도로엔 시체들이 끔찍하게 전시돼 있다. 그나마 남은 경찰도 매수당해 누구 편인지 알 수 없고, 감시할 언론도 없다. FBI 요원 케이트는 CIA와 함께 거대 범죄 카르텔의 보스를 잡기 위해 후아레즈에 잠입한다.


실제 후아레즈에서 촬영한 <시카리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영화다. 마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리얼리티가 강점이다. 주인공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CIA가 돕는 의문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가 작전 방식의 위법성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 가운데 영화는 후아레즈에 살고 있는 한 소년 가족을 보여주며 이 아이의 미래는 누가 책임질 거냐고 묻는다.


단순 액션 스릴러가 아니라 장면마다 에너지가 넘치는 강력한 드라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전작 <그을린 사랑>에서 중동의 비참한 상황을 한 쌍둥이 남매의 운명과 교차시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감동을 만들어낸 적 있는데 <시카리오>는 그 연출력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4. 폭스캐처


한마디로: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억만장자가 올림픽 레슬링 영웅을 총으로 쏜 실제 사건을 파헤친 심리드라마.

2014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88%.


상속재벌 존 듀폰의 집에는 레슬링과 관련한 트로피들이 즐비하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각종 레슬링 단체를 조직해 대회를 개최할 수 있고 시니어 레슬링 대회에 참가해 우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겐 한 가지 없는 게 있다. 올림픽 메달이다. 그것만 있으면 그의 인생이 완성될 것 같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올림픽 레슬링 영웅을 지도해 코치로서 올림픽에 참가하고자 한다.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는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듀폰의 돈과 호의에 감동해 가족 전체를 데리고 이사온다. 그런데 슐츠의 코치였던 형과 듀폰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한다. 돈으로 사람들이 박수치게 할 수 있고 트로피를 만들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 자신이 그 감정을 경험할 수는 없다. 듀폰 역을 맡은 스티브 카렐의 허망한 표정을 담은 눈빛 연기가 일품이다.



5. 내일을 위한 시간


한마디로: 프랑스판 <송곳>. 해고 위기에 몰린 여성 노동자가 동료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

2014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7%.


“난 너의 해고를 선택한 게 아니야. 단지 그 돈이 필요할 뿐이야.”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사장의 통보에 어떤 동료는 이렇게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녀를 선택한다. 산드라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이를 키우려면 일자리가 필요하다. 영화는 산드라가 16명의 동료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과정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그녀는 몇 번이나 포기해버리고 말리라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들의 의사를 일일이 물어본다.


어쩌면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 지도 모른다. 산드라에게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그 사실이 중요했을 뿐이다. 이틀이 지난 뒤 그녀는 작은 성취감에 행복해 한다.


장 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는 항상 절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자식을 버린 아버지(<더 차일드>, <자전거 탄 소년>), 절박하게 일자리 찾아 나선 소녀(<로제타>), 아들을 살해한 소년을 가르치게 된 아버지(<아들>), 불법 이민자로 인한 갈등(<약속>, <로나의 침묵>) 등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엔 도덕적 선택의 딜레마에 빠진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데 <내일을 위한 시간>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목소리 높여 외치는 영화가 아니라 조용히 설득하는 영화다. 꽉 막힌 세상에서 아주 작은 환희의 순간을 마주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꼭 만나보시길.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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