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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반전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협녀'다. 협녀는 홍이다. 김고은이 연기한 홍이가 중심이다. 이병헌이 연기한 유백의 비중이 크지만 그것은 이병헌이 그만큼 연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와호장룡>에서 주윤발이 내뿜은 존재감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설랑은 협(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협은 사사로운 것을 끊어내는 것이다." 영화는 반전으로 욕먹었지만 사실 이 영화의 중심 플롯은 문제 없다. 협녀의 복수는 그것이 사사롭지 않을 때에도 응당 행해져야 한다. 비록 복수의 대상이 부모일지라도 달라져선 안된다. 그것이 '협'이다.


하지만 불편하다. 도대체 왜 부모를 죽이는가. 또 부모는 왜 자신의 딸이 자신을 죽이기를 원하는가. 여기서 이 영화의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는 이를 제대로 설득해내지 못한다. 중력을 무시하며 허공을 날아다니는 경공 액션 때문에 영화가 망한 게 아니다. 그런 건 초반에 보여주면 관객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슈퍼히어로물이 달리 흥행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영화라고해도 친부모 살해는 조심해야 한다. 요즘 [맥심]의 화보가 왜 비판받고 있는가? 여자를 납치해 차에 싣는 악당은 영화 속에 부지기수로 등장하지 않는가? 하지만 영화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제시해 관객들을 설득한다. 이에 반해 [맥심] 화보는 맥락없이 이미지만을 차용했다. 당연히 독자는 기분 나쁠 수밖에 없다. <협녀, 칼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소위 '패륜'을 반전으로 제시하려면 이중 삼중으로 개연성을 만들어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이미지로만 가져왔다. 거기에 '협'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만 붙였다.


논란의 맥심 화보


최근 딸의 부모 살해가 등장하는 두 편의 한국영화가 더 있다. <차이나타운>과 <암살>이다. 두 영화는 <협녀, 칼의 기억>과 다르다. 설득해낸다. <차이나타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쓸모'라는 개념을 관객에게 주입시킨다. 엄마(김혜수)는 딸 일영(김고은)에게 반복해서 "쓸모가 있어야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 역시 그녀의 엄마를 죽이고 그 자리에 올라왔다고 말한다. 여기에 엄마의 잔혹한 행동은 관객이 느낄 일말의 동정심을 제거해준다. <암살>도 마찬가지다. 안옥윤(전지현)은 살해 명령을 받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됐을 때 망설인다. 관객도 과연 딸이 아버지를 죽일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강인국이 "나는 모르는 년"이라며 안옥윤을 향해 총을 쏘자 비로소 그는 관객에게 죽여도 되는 악당으로 각인된다.


다시 <협녀, 칼의 기억>으로 돌아가보자. 홍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자신은 상관없다며 지금까지 일직선으로 달려왔던 인생의 경로를 수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홍이는 '의'를 해친 부모를 '협'으로 처단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녀가 엄마에게 받은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것을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사건을 만들어냈어야 한다. 유백이 두 사람을 배신한 뒤 무엇이 더 나빠졌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또 설랑에게 죽은 풍천(배수빈)의 좌절된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줬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황홀한 미장센과 뜬구름 잡는 대사로만 채운다. 플롯은 있되 서사의 개연성이 해결되지 않으니 그밖의 것은 다 무용하다. 도대체 이 난국을 어찌할 것인가.



순제작비 90억원이 들었다. 손익분기점은 관객 350만명선이다. 하지만 극장에선 43만명만 봤다. 일찌감치 IPTV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과연 TV로 반전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은 미장센이다. 해바라기 언덕, 비 내리는 숲속, 바람 부는 갈대밭, 눈 내리는 무령궁에서 눈을 호강시키는 화면이 펼쳐진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 멋지다. 무형문화재 장인이 만들었다는 수직적인 무령궁 세트도 근사하다. 마치 중국영화 <영웅>의 황궁을 보는 듯하다. 배경과 액션이 <와호장룡>, <일대종사>를 닮았다는 말은 칭찬이다. 그 영화보다 어떻게 더 잘 만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액션의 합은 잘 맞지 않는다. 특히 전도연이 하는 무술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손으로 대충 휘두르는데 적들은 쓰러져 나간다. 전도연은 감정 연기에선 빼어나지만 무술 연기는 낯설어 보인다. 그에 비해 이병헌은 감정 연기와 무술 연기 모두 좋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 때문에 그가 김고은과 마주칠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돼 불편하다.


영화를 만든 박흥식 감독은 나이 50에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 SBS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 강점을 보여온 감독이다. 그가 <인어공주>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묘사했던 것만큼 <협녀, 칼의 기억>에서도 설랑과 홍이의 관계를 자세하게 묘사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와 화면이 어우러진 무협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지만 결과물은 그가 우려했던대로였다. 실컷 폼을 잡고 있지만 밀도는 부족한 영화로 남았으니 말이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가 시나리오를 잘못 쓴 탓이다. 그의 아내인 오명준 편집기사를 비롯해 이 영화의 화면을 만들기 위해 공들인 스태프들에게 그는 큰 빚을 졌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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