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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선택은 <보이후드>가 아닌 <버드맨>이었다. 필자는 지난주 12개 부문을 예측해 9개를 맞히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작품상을 못 맞혔으니 할 말이 없다. <보이후드>는 안전지원, <버드맨>은 소신지원이었는데 과감하게 질렀어야 했다. 필자가 로또를 사지 않는 이유다. 결정적인 순간에 잘 맞지 않는다. 아카데미 예측은 로또보다는 쉬운 편이지만 영화가 뜨고 지는 흐름까지 읽어야한다.


아카데미 이전 두 영화의 선호도는 팽팽하게 갈렸다. 평론가협회, 골든글로브, 영국영화협회는 <보이후드>, 감독조합, 배우조합은 <버드맨>의 손을 들어줬었다. 한마디로 제작 현장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버드맨>,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보이후드>를 선호했던 것. 두 영화가 미국의 주요 영화상을 양분해온 셈이다. 그러나 개봉 후 시간이 지난 <보이후드>가 지는 해였던 반면, <버드맨>은 작년 말부터 미국에서 극찬을 받으면서 뜨는 해였다. <버드맨>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서로 다른 영화에 나눠준 선례는 3년만에 몰아주기 규칙으로 복귀했다.


필자가 또 틀린 부분은 음악상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가져갔다. 앞서 필자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예측했었다. 덕분에 지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OST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작품별 수상 리스트와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버드맨: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음악상

위플래쉬: 남우조연상, 편집상, 음향상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남우주연상

스틸 앨리스: 여우주연상

보이후드: 여우조연상

이미테이션 게임: 각색상

셀마: 주제가상

아메리칸 스나이퍼: 음향편집상

인터스텔라: 시각효과상

빅 히어로 6: 장편 애니메이션상

시티즌 포: 장편 다큐멘터리상

이다: 외국어영화상



날아오른 버드맨 혹은 무지에 대한 뜻밖의 미덕


<버드맨>의 원제는 `버드맨 혹은 무지에 대한 뜻밖의 미덕'이다. 이 자의식 강한 제목의 영화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뛰어난 통찰력과 강렬한 에너지로 그려냈다. 자아를 찾아 방황하던 주인공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처럼 근사하게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근래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영화들(노예12년, 아르고, 아티스트, 킹스 스피치) 중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한 번의 카메라 커팅도 없이 원테이크-원시퀀스처럼 보이도록 교묘한 롱테이크 촬영을 해낸 엠마뉴엘 루베츠키의 솜씨도 놀랍다. 그는 작년 <그래비티>에 이어 2회 연속 촬영상을 수상했다.


필자가 <버드맨>을 작품상에서 배제했던 이유는 브로드웨이에 비교하며 할리우드의 열등감을 표출하는 몇몇 대사들과 감독이 멕시코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아카데미는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포용했다. 어쩌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발표 때부터 흑인 영화가 외면받으며 인종문제 이슈가 터졌던 것이 <버드맨>에게 반대급부가 됐을 지도 모른다.


작품상을 발표하러 나온 숀 펜은 <버드맨>을 호명하기에 앞서 "누가 이 개자식에게 그린카드(영주권)를 준거지?"라며 뼈 있는 농담을 던졌고, 상을 받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수상한 멕시코인이 등장한 것을 본 미국 정부가 조만간 아카데미에 이주 제한 기준을 적용할 지 모르겠다"며 이민정책을 조롱하기도 했다. 아, 숀 펜과 이냐리투는 <21그램>을 만들 때부터 친구사이다.


한국에선 개봉을 앞두고 영화 첫 장면에 김치 비하하는 대사가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 정도야 취향의 문제로 넘어가도 좋다. 세상에 모든 외국인이 김치를 찬양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오히려 김치가 그만큼 보통명사처럼 쓰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천재소년 두기의 스트립쇼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는 코미디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가 맡았다. 그는 우리에겐 <천재소년 두기>로 친숙한 배우다. 큰 인기를 얻은 아역 배우들은 성장과정에서 박탈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약에 빠지거나 섹스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역시 위기를 겪었다. 그가 성인 연기자로 이름을 알린 것은 31살에 출연한 <해롤드와 쿠마>에서 마약과 섹스를 밝히는 아역배우 출신인 본인 스스로를 연기하면서부터다. 이후 CBS 간판 드라마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바니 스틴슨 역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 드라마는 시즌 9까지 계속됐는데 시즌이 계속될수록 바니의 비중은 점점 커졌다. 그는 연극, MC에서도 재능을 발휘해 토니상에서 남자 연기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토니상과 에미상의 사회를 봤고, 여세를 몰아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까지 맡았다.


해리스의 진행은 초반엔 조금 밋밋했다. 작년과 재작년의 사회자인 엘렌 드제네레스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많았다. 유머는 잘 터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해리스의 표정도 위축되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을 패러디해 팬티 차림으로 등장한 장면이 SNS를 도배하며 이슈를 만들어 냈고 그 뒤부터는 매끄러운 진행으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것은 <버드맨>의 팬티 차림은 자극적인 것만 좇는 SNS 시대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한 장면이었는데 해리스의 스트립쇼 역시 SNS를 통해 떴다는 것이다. 영화가 현실의 복사판이 된 순간이었다.


혹시 그의 팬티 차림 모습에 섹시함을 느낀 분이 있다면 그가 드제네레스처럼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고 한 남자배우와 결혼해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품절남이라는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인권, 감동... 수상소감은 발언대


인종, 여성, 자살, ALS(루게릭병) 등 이번 시상식엔 유독 인권 관련 발언이 수상소감으로 많이 등장했다.


여기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앞서 지적했듯 이번 시상식 후보에 흑인 영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 특히 50년 전 마틴 루터 킹의 시위행진을 다룬 영화 <셀마>가 감독상(아바 두버네이)과 남우주연상(데이빗 오예로워) 후보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래서 <셀마>의 'Glory'를 만든 존 레전드가 주제가상을 수상했을 때 객석은 어느 때보다 뜨거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또, 작년 소니픽처스 해킹 사태가 터졌을 때 영화인들의 급여가 공개됐는데 이때 남녀 사이 임금 격차에 대한 분노가 남녀 평등의 문제로 거론됐다. <보이후드>로 유일하게 수상한 퍼트리샤 아켓은 수상소감으로 "평등의 의미는 평등"이라며 "남녀가 동일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고, 메릴 스트립과 제니퍼 로페즈가 이에 환호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아카데미 부문별 후보에도 여성 영화인은 소수였는데 각본, 촬영 부문처럼 아예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옥타비아 스펜서는 시상식 후반부에 무대에 올라 이런 남성 위주 관행을 지적하기도 했다.


ALS는 에디 레드메인이 언급했다. 루게릭병 환자인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그는 "이 상을 ALS 환자들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자살 문제는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크라이시스 핫라인>의 데이나 페리가 꺼냈다. 그는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이제 자살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놓을 때"라고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가장 감동적인 수상소감은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각색상을 수상한 그레이엄 무어에게서 나왔다. 높은 톤의 목소리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던 그는 갑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16세에 자살하려 했습니다.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고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당신 차례가 오면 이 무대에 서서 다음 사람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세요. 이상해도 괜찮아. 남들과 달라도 괜찮아." 스티븐 잡스의 유명한 경구를 패러디한 "Stay weird, stay different!"는 SNS에서 어록이 카드로 뿌려지며 큰 울림으로 남았다.




영화 같은 축하공연


장편 애니메이션상 부문 후보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외된 <레고무비>의 감독은 시상식 전 레고로 만든 오스카 트로피를 공개했는데 <레고무비> 축하공연 도중 오프라 윈프리와 엠마 스톤이 이 트로피를 들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화제가 됐다.


아카데미는 제작 50주년을 맞은 <사운드 오브 뮤직>을 기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한 레이디 가가는 지금까지와 전혀 달리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태연하게 '도레미송'을 비롯한 영화 주제곡을 불렀다. 하이라이트는 그녀가 영화의 히로인 줄리 앤드류스를 소개할 때였다. 무대에 오른 80세의 줄리 앤드류스는 등장 자체로 아우라를 뿜어내며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그녀는 음악상 시상자로 나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게 상을 안겨주었는데 이 영화 속에도 나치를 연상시키는 가상의 독재국가가 등장한다. 50년 전 나치를 피해 알프스를 넘어간 한 가족을 그린 영화의 주인공이 이를 소재로 한 또다른 영화에 상을 안겨준 것이다. 이런 드라마틱한 순간을 쇼로 만들어내는 곳이 할리우드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볼 때마다 매년 잡음을 빚고 있는 한국의 영화상들을 돌아보게 된다.




PS)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위플래쉬>는 이번 시상식의 또다른 승자다. 각각 4개 부문, 3개 부문을 수상했는데 해당 분야에서 압도적인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어서 아무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시상자가 걸어나오는 무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입구처럼 디자인됐다.


PS2) 오스카는 매년 그해 세상을 떠난 영화인들을 'In Memoriam'으로 추억하고 있다. 올해엔 메릴 스트립이 등장해 <소피의 선택>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들의 얼굴이 화면 속에 등장했다. 1년간 세상을 떠난 영화인들의 이름을 적으며 이 글을 마친다.


미키 루니, 폴 마주르스키, 제임스 가너, 엘리자베스 페냐, 알란 허쉬펠트, 조지 리틀, 제임스 시게타, 아니타 에크버그, H.R 기거, 비르나 리시, 고든 윌리스, 리차드 아텐보로, 오스왈드 모리스, 탐 롤프, 사뮤엘 골드윈 주니어, 마사 하이어, 지미 무라카미, 로빈 윌리암스, 로드 테일러, 루이스 레이너, 딕 스미스, 로렌 바콜, 월트 마틴, 찰스 챔플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알랭 레네, 밥 호스킨스, 마이크 니콜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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