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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영화에 대해 쓸 때 배우 위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연기보다는 스토리에 더 집중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나를 찾아줘>는 한 여배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저먼드 파이크.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강렬하게 눈을 치켜뜨며 등장했다가 어느 순간 영화의 제목 'Gone Girl'처럼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1시간쯤 지나 다시 등장하더니 이후엔 스스로 극적 반전을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아름다운 외모에 명석한 두뇌를 가졌고 자기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여자. 무엇보다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관객에게 끊임없이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여자.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역할은 아마도 전세계의 모든 여배우들이 탐냈을 만한 그런 배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 영화 속 '팜므 파탈'이 대개 억울한 일을 당한 뒤 복수하기 위해 남자를 이용하는 악녀였다면 에이미는 그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만들어갈 삶을 위해 남자를 도구로 이용하죠. 유명한 전업 작가인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만든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동화 속 캐릭터를 앞세운 거짓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는 그녀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신의 삶을 더욱 통제하기 원하는 이유가 됩니다. 함께 살기엔 끔찍하지만 대중적 이미지로 소비하기엔 흥미진진한 여자. 영화의 만듦새도 무척 뛰어나 아마도 데이비드 핀처 필모그래피에 <쎄븐>에 필적할 스릴러 걸작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훗날 이 영화의 에이미는 <이중배상>의 바바라 스탠윅으로부터 이어지는 영화 역사상 '팜므 파탈'의 계보를 잇는 캐릭터로 등극하리라 예상합니다.



로저먼드 파이크를 보고 있으면 니콜 키드먼이나 나오미 와츠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이 역할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사라진 여자'이니 만큼 신비감을 주고 싶었던 거죠. 로저먼드는 그동안 여러 액션영화와 코미디영화에 출연했지만 눈에 띄는 주연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어쩌면 그렇게 소리없이 조연만 맡다가 늙어갈 수도 있었을 그녀에게 <나를 찾아줘>는 커리어 대반전을 기록할 것이 분명합니다. <나를 찾아줘>에서 그녀의 연기는 너무 강렬해서 소름끼칠 정도니까요.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게 화면을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계획을 짜고 그 계획대로 차곡차곡 일을 꾸며갈 때의 신중한 표정도 좋습니다만,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의 집에서 그와 함께 남편이 등장하는 TV 토크쇼를 보면서 자신이 원했던 대로 행동하는 남편의 모습에 만족해하는 표정을 옆에 앉은 남자에게 감추는 연기의 디테일도 참 능숙합니다.


로저먼드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수재입니다.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가 하버드와 예일을 졸업한 '완벽녀'인 것과 닮았죠. 그런데 아쉽게도 로저먼드의 필모그래피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 본드걸'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는데 <오만과 편견>에선 키이라 나이틀리에 가렸고, <언 에듀케이션>에선 캐리 멀리건이 워낙 도드라져 잘 보이지 않았죠. 톰 크루즈 원톱 영화인 <잭 리처>에선 제법 많은 나왔음에도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게임을 영화화한 <둠>에선 주연을 맡았는데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 했고, <타이탄의 분노> <자이 잉글리쉬 2>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어요.


오만과 편견


언 에듀케이션


타이탄의 분노


잭 리처


한마디로 <나를 찾아줘> 이전의 영화에서 그녀는 평범합니다. 밋밋하게 예쁜 얼굴인 외모는 그다지 특색 없는 편이라서인지 웬만큼 강한 역할이 아니면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그녀에게 이토록 강렬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감독과 제작진이 어떻게 발견했는지가 더 궁금할 정도입니다. 로저먼드는 1979년생으로 현재 35세인데 뒤늦게 연기인생에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이는 15년간 무명생활을 하던 나오미 와츠가 2001년 <멀홀랜드 드라이브>로 각광받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로저먼드는 <잭 리처> 한국개봉을 맞아 내한하기도 했었는데요, 그때 인터뷰를 찾아보니 이런 말을 했더군요. "배역을 주는 것만도 감사해서 역할을 크게 가리지 않는다"라고요. <나를 찾아줘> 이후에는 아마도 그녀를 주연으로 한 영화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S) 그녀는 옥스포드 대학 재학 시절 배우인 사이먼 우즈와 사귀었고, 2007년엔 <오만과 편견>으로 만난 조 라이트 감독과 약혼했다가 이듬해 파혼했습니다. 2009년부터 수학자 로비 유니아케와 동거에 들어가 2살난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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