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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기존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입니다. 블록버스터를 정의하는 규모같은 것은 딱히 없지만 <조스> 이래 그 나라 영화시장을 쑥대밭(?) 만들 폭탄이 될 수 있는 영화를 통상 블록버스터라고 불러왔다는 점에서 최소 530만 명(손익분기점)의 관객을 예상하고 만든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겠죠. 비록 <명량>의 회오리 급류에 밀려 첫 주 1위를 놓치긴 했지만요.


제 다른 글 참조

>> 관객 2천만명이 필요한 600억 스크린 대전

>> 명량으로 쏠리는 이유 다섯가지


올여름 스크린 대전의 네 편 중 지금까지 <해무>를 제외한 세 편을 봤는데 순위를 매기자면 <해적> <군도> <명량>의 순이었습니다. <명량>은 전투장면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위인전을 보는 듯 지루했고, <군도>는 스토리는 없지만 그나마 캐릭터가 살아있던데 반해, <해적>은 여름 오락영화로서 고른 재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비록 초반 기대치를 조성하는데 다른 영화보다 미흡했고, 또 <명량> 돌풍에 밀려 스타트가 불안하긴 하지만 결국 입소문을 타고 꾸준한 항해를 해나가 손익분기점을 넘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해적>과 같은 영화는 다시 만들어지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적>이 잘한 것과 못한 것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어드벤처 불모지 한국에서 탄생한 해양 어드벤처


이 영화는 <캐리비안의 해적>에 곧잘 비교됩니다. 그런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한국에서 관객이 얼마나 든 줄 아십니까? 세번째 편인 2007년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가 450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가장 최근작인 2011년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310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즉, 해양 어드벤처는 한국에서 관객층이 정해져 있어 관객 500만명을 넘기기 힘든 장르입니다.


게다가 바다에서 해적이 배 타고 다니는 이야기를 담은 한국영화가 기존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영화에서 배가 등장하는 영화는 대개 비장하거나 사회성 짙은 이야기를 그려왔습니다. 배타고 모험을 떠나는 한국영화를 본 기억이 제겐 없습니다. (있다면 제보해주세요.) 결국 해양 어드벤처는 할리우드에서 온 모델이고 이를 응용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 셈이죠.


그런데 이처럼 낯선 장르를 공략할 때 한국영화의 성공 공식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캐릭터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 그랬고 <도둑들>이 그랬습니다. <놈놈놈>을 분명하게 벤치마킹한 <군도> 역시 캐릭터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손예진, 김남길, 이경영, 유해진 등 좋은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고 그들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를 끌고가는 것은 장르 안에서의 스토리와 '여월-사정-소마-관'의 사각구도입니다. 어느 한 명의 캐릭터가 도드라져보이지 않으면서도 이야기 자체로 승부를 걸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한국영화가 하지 못한 <해적>의 성과입니다.



해양 어드벤처가 팩션과 만났을 때


<해적>은 조선건국 초기를 배경로 하고 있습니다. 위화도, 개경, 벽란도 등의 지명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명백히 역사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은 TV드라마 [정도전]이나 <명량>이 지향하는 정통사극이 아니라 [해를 품은 달] [추노] 같은 팩션에 가깝습니다. <해적>의 시나리오를 쓴 천성일 작가는 드라마 [추노]와 영화 <7급 공무원>의 각본을 쓴 사람입니다. [추노]에서는 현실과 역사를 기발하게 접목시켰고, <7급 공무원>에서는 직장인 코믹 어드벤처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해적>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시대배경이 크게 필요없다고 느꼈습니다. 해적 이야기를 하는데 고려시대면 어떻고 조선시대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한국 관객들은 <명량>의 성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확실히 판타지보다는 리얼리티를 좋아합니다. <해적>이 고려말 조선초를 배경으로 삼고 이성계와 정도전 같은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어드벤처 영화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천성일 작가의 솜씨는 완벽하지 못합니다. <7급 공무원>의 어드벤처와 [추노]의 팩션이 섞였지만 역사에서 오는 비장미가 가끔 어드벤처를 압도합니다. 어차피 이야기의 무대는 바다이고 캐릭터도 가상의 해적과 산적들이다보니 역사는 양념 정도로만 버무려도 되는데 굳이 권력쟁탈전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고래가 맥거핀이었음이 밝혀지자 일부 관객들은 "스케일에 비해 목표가 뚜렷하지 않았다"며 허탈해하기도 합니다. 또 조선이 명나라에서 보내준 국새를 받아 썼다는 사실을 굳이 들춰내는 설정은 의도과 관계없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좋은 소재입니다. <해적>을 비판하는 미디어 리뷰들을 읽어보면 대부분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이자 횡설수설 코미디"라며 혹평을 퍼붓습니다. 이런 리뷰를 쓴 기자들은 너무 진지한 관객들입니다. 소마(이경영)의 출생의 비밀이라도 밝혀줘야 만족했다고 쓰게될까요?



새 모델이 되거나 고래밥이 되거나


<해적>은 흥행 실패하기엔 아까운 상업영화입니다. 이만한 만듦새를 가진 상업영화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뭅니다. 벽란도에서 벌어지는 여월(손예진)의 롤러코스터 액션신이나 바다에서 배 세 척이 모여 벌어지는 백병전 등 볼거리가 화려한데 그것들이 이야기와 겉돌지 않습니다. 빠른 전개로 인해 군데군데 편집상 튀는 장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습니다. 또 겁많은 두령 장사정(김남길)이나 입담을 과시하는 철봉(유해진) 등 캐릭터들의 매력이 철철 넘쳐 흘러 영화를 보기 전과 보고난 후의 선호도가 바뀌는 영화입니다. 천성일 작가의 장기는 [추노]의 무리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산적들과 해적들의 입재담에서 발휘됩니다. 고래밥이 되어도 그 안에서 "음~파" 추임새를 넣으며 재미있게 놀 것 같은 이 캐릭터들 덕분에 130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이 길지 않게 느껴집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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