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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의 원작은 1963년 프랑스의 피에르 불이 쓴 소설 [원숭이 행성(La planete des singes]이다. 피에르 불은 <콰이강의 다리>와 <혹성탈출> 두 편으로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다. 원작 소설에서는 지구인이 불시착한 행성이 지구와 비슷하기는 했지만 지구는 아니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반토막난 채 모래사장에 쳐박혀 있던 <혹성탈출>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을 시나리오로 만든 마이클 윌슨과 로드 세링의 상상력에서 탄생한 영화만의 오리지널이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혹성탈출>을 소재로 한 여덟번째 영화다. 1968년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혹성탈출>이 디스토피아 SF로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래 20세기 폭스사는 5편의 시리즈를 5년 사이에 연속해서 제작했다. (아류작이 대개 그렇듯이 속편 4편의 평가는 별로 좋지 않다.) 이후 2001년 새로운 세기를 맞아 팀 버튼이 1편을 리메이크하며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려고 했으나 흥행성적에 비해 완성도에 문제가 제기되며 속편은 흐지부지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20세기 폭스는 새로운 <혹성탈출> 시리즈를 기획했는데 이는 최근 유행하는 '리부트' 바람을 타고 지구가 유인원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혹성탈출> 이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유인원들이 지구를 지배하게 됐을까? 리부트 3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그 해답을 인간들이 개발한 치매 치료제에서 찾았다. 인간의 손상된 두뇌를 재생시키는 이 의약품이 유인원의 지능도 일깨웠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하지만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이론이 아니다. 먼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과 원숭이는 한 뿌리였지만 점점 다른 가지를 치며 내려왔다. 지금의 인간이 과거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까지 서로 다른 가지를 따라 내려왔듯, 원숭이도 과거의 원숭이가 진화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즉, 원숭이는 인간의 사촌 종이지 조상 종이 아니다.


이처럼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없다는 다윈의 이론을 이해한다면, 이 영화에서 시저가 인위적인 약품에 의해 지능을 발달시켰어도 그 지능, 즉, 획득형질은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는 시저 만큼이나 지혜로운 시저의 아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유전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시저가 약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유인원들이 태어날 때마다 뿌려준다면 가능하겠지만 영화 첫 장면에서 인간은 바이러스에 의해 거의 멸망상태가 되고 연구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뭐, 어쨌든, 영화는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필자도 안다. 과학적 오류에 대한 지적은 이쯤에서 넘어가자.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플롯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 유인원과 유인원의 대립이 그것이다.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들은 위축되어 있다. 그들은 드레이퓌스(게리 올드만)라는 리더의 지휘 하에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간에 모여 산다. 유인원 역시 금문교 건너편에 모여 살고 있는데 그들은 시저(앤디 서키스)를 따른다. 특이한 점은, 영화가 드레이퓌스와 시저의 대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말콤(제이슨 클라크)과 코르넬리아(주디 그리어)를 등장시켜 이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는 것이다. 말콤은 댐 전문가도 아니고 협상 전문가도 아니다. 그는 그저 모험심과 사명감에 의해 유인원의 소굴로 뛰어들고 시저의 친구가 된다. 영화는 왜 굳이 드레이퓌스의 비중을 줄여가면서까지 말콤을 등장시켰을까? 그것은 아마도 유인원이 인간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말콤이라는 인물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성패는 유인원 세계를 더 정교하게 묘사함으로서 인간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인간이 등장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이 영화가 <혹성탈출> 시리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혹성탈출>은 유인원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반추하게 하는 시리즈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그에 따른 인식과 성찰이 관객에게 통찰력과 모멸감, 그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왔다. 팀 버튼의 2001년 작품은 그런 고민이 부족해 실패한 경우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시저가 점점 지능을 갖게 되면서 그가 겪는 성장단계(말을 익히고, 독립의지를 갖게 되며, 결국 사회를 만든다)를 통해 인간의 기원을 돌아볼 수 있었다면,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군집을 이룬 유인원이 어떻게 갈등을 겪고 이를 돌파해 나아가는지를 통해 인간이 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건설하기에 이른 과정을 반추한다. 이 과정에서 시저가 쿠데타를 일으킨 코바에게 하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지금까지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유인원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


46억년 지구 역사를 돌아보면, 지구의 지배자는 더 진화된 종족으로 계속 교체되어왔다. 공룡처럼 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거대한 종은 운석의 충돌 같은 인위적인 힘에 의해 종족 교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만약 어떤 종족이 인간을 멸종시키려 한다면 그 종족은 인간보다 더 진화된 종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유인원은 인간보다 더 힘이 세면서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실패를 되풀이한다. 유인원이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대사와 상황은 훗날 먼 우주로 도피한 인간이 지구를 탈환하려 돌아오는 빌미를 제공하는데 복선 기능을 할 것이다.


말콤은 시저를 돌봐주고 살려주는 순수한 선행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유인원이 지구를 지배하는데 일조한다. 코바를 없앤 시저는 인간이 유인원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미 시작된 전쟁을 중단할 수 없다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유인원의 사회는 시저라는 리더 한 명이 일사분란하게 이끌어가는 사회다. 유인원들은 힘센 자를 숭배하며 복종한다. 마치 과거 로마시대 갈리아(프랑스)를 정복한 카이사르 황제나 몽골제국을 이끌던 징기스칸을 닮았다. 그에 반해 인간 사회는 문명이 초토화됐고 리더 드레이퓌스는 유약해 보인다. 인간이 애써 이룩해온 민주주의는 문명의 붕괴와 함께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일사분란한 중앙통제식 집단과 과거의 영화에 젖어 있는 오합지졸 집단 간의 대결에서 승패는 명약관화해 보인다. 문제는 두 종족의 권력 교체 과정에서 유인원들이 어떤 통찰력을 보여주느냐다. 그들이 얼마나 더 인간을 뛰어넘어 진화할 수 있을지 시리즈의 최종회인 3편이 기다려진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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