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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역린>에서 [중용] 23장을 해석한 부분입니다. 정조(현빈) 옆을 지키던 상책(정재영)의 대사와 보이스오버로 초반과 후반에 두 번 등장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그런데 [중용] 원문을 찾아보면 사실 조금 다릅니다.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그 다음은 한쪽으로 지극히 함이니, 한쪽으로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다.

성실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할 수 있으니,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할 수 있다.


전통문화연구소가 1991년 출간한 [대학, 중용집주]에 나온 해석입니다. 조금 차이가 느껴지나요? 영화에서는 상당히 부드럽게 의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영화 <역린>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중용]에 대해 짚고 넘어가봅시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습니다. 정도전이 구국이념으로 채택했고 불교신자였던 이성계가 동조하면서 성리학은 통치이념이 되었습니다. 성리학에는 교과서라 불리는 사서삼경이 있는데 이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와 [시경] [서역] [주역]의 '삼경'을 말합니다. 조금 고리타분한가요? 그래도 이 책들의 역학관계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중용]은 원래 유학의 전통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논어] [맹자]만이 유학의 정통이었죠. [중용] [대학]은 유학의 5경 중 하나였던 [예기]의 두 편명에 불과했던 것을 송나라의 주희가 따로 떼어내 '사서'의 반열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권은 [논어] [맹자]보다 분량이 얇습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강연록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 따르면, 당나라가 망한 이후 송나라 유학자들이 도교나 불교 대신 유학을 뿌리로 삼고 [중용] [대학]을 급히 통치이념으로 끌어올리게 된 이유는 [논어]에서 공자가 계급의 무용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연한 계급사회였던 송나라는 급진적인 계급무용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를 절충해줄 사상이 필요했습니다. 이 점은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죠. 주희는 계급 대신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눠 곡해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유학이 통치이념이 되려면 사상적 정통성이 굳건해야 했고 이에 [중용]과 [대학]이 동원된 것입니다.


[중용] [대학]은 언급된 23장의 내용에서도 드러나듯이 군자가 되기 위한 수행방법에 관한 책입니다. 공자는 '군자'라는 개념을 계급과 상관없이 사용했지만, 송나라 유학자들은 천자나 제후가 아닌 자신들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해 '군자'를 제시했습니다. 군자가 되기 위한 수행방법은 불교의 수련에서 차용한 것이기에 종교적 속성도 있습니다. 덕분에 그전에는 학문이었던 유학이 비로소 '유교'라는 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리학자들이 자신이 지배계급이라는 것을 학문적, 정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것이 [중용]과 [대학]인 것이죠. 영화 속에서 정조가 사서삼경을 외울 것을 고집하는 당대 유학자들을 꾸짖는 장면은 이런 모순을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영화의 배경을 살펴볼까요? 때는 정조 즉위 1년인 1777년 7월 28일. 영화는 정유역변을 모티프로 허구의 구성을 가미해 그날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소설이 출간됐다고 해서 찾아보니 원작이 아니라 영화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더군요.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가족사도 흥미진진하고 파벌세력에 의해 제압당한 약한 왕권 등 당대 정치지형도 긴장의 연속이어서 그동안 숱하게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숙종시대 소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장희빈이 결국 사약을 받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어린나이에 죽은 이래 조선은 영조 때부터 줄곧 노론이 지배했습니다. 그중 노론 벽파는 왕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노론을 싫어해 준탕평책을 펴던 사도세자가 결국 노론의 힘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이산은 목숨이 위태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산이 무사히 살아남아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영조가 아들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손자를 각별히 지켜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살해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의 자기수양이 그가 개혁적인 정치를 펴는 밑거름이 됩니다.


영조가 66세에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한지민)는 노론 벽파 김한구의 딸이었는데 호칭은 할머니지만 정조보다 겨우 7살 많았습니다. 영화 속 배경인 정조 1년, 정조는 26세였고 정순왕후는 33세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유역변이 실패한 후 숨어지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는데 1800년 정조 독살설의 유력한 용의자로 거론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녀는 정조 사후 노론의 적이라 판단되면 가차없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왕족의 씨마저 말려놓았습니다.(오죽했으면 강원도에서 나무하던 사도세자의 방계 증손자가 헌종 사후 즉위해 철종이 됐을까요?) 정조가 죽은 뒤엔 정순왕후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정조의 10살난 차남을 왕위(순조)에 앉혀놓고 수렴청정했습니다. 이때 노론의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해 이후 다시는 등용하지 못하게 했고 천주교를 탄압해 신유박해를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1805년에 죽었는데 이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섭정하면서 안동 김씨 천하가 열립니다. 한마디로 정조 사후는 조선의 암흑기였고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로도 그다지 다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는 정조 1년 실존했던 인물들을 대척점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허구의 인물들을 끼워넣어 스토리를 짰습니다. 허구의 인물로는 고아원 아이를 청부살수(킬러)로 길러내는 광백(조재현)과 그 아이들인 갑수(정재영), 을수(조정석), 월혜(정은채)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정조와 혜경궁 홍씨(김성령),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 물고 물리는 관계를 형성하며 영화를 끌고 나갑니다. 개인적으로는 광백과 아이들의 모습에서 장 피에르 주네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가 떠올랐는데요, 배경은 다르지만 <역린>에서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이야기를 끼워넣은 것은 용기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 역사 속 정조와 허구 속 핍박받던 아이들의 우정 이야기가 제법 잘 어울립니다. "작은 일이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도 좋은 설정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좋은 소재와 메시지가 영화의 완성도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한계입니다. 이재규 감독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혹은 촬영해 놓은 필름이 아까워서 과감하게 자르지를 못했습니다. 배우들의 이름값이 갖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 버거웠던 걸까요? 신인감독이 자기 손발 자르는 것 같아 자신이 없다면 편집기사를 믿고 맡겼어야 합니다. 작은 일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영화 전반의 주제의식은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지나친 친절함과 산만함은 중간중간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뚜렷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저는 <역린>이 비교적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들여 찍은 화면 역시 돋보입니다. 특히 비오는 날 존현각에서의 격투 장면은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가 떠오르면서 기존 한국 사극에서 볼 수 없던 영상 퀄리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의 단점들은 비교적 극복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중간중간 엉뚱한 산으로 가는 내러티브를 조정하고, 눈에 거슬리는 몇몇 장면들을 손보면 됩니다. TV 드라마를 연출하던 시절의 관습을 고쳐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영화가 전달하려는 사연들의 진정성은 이 영화가 이끌어낸 성취이고 쉽게 이룩해내기 힘든 것입니다. 특히 월혜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복빙(유은미)을 위로하면서 혜경궁 홍씨에게 "10살난 아이의 목숨은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인가요"라며 쏘아붙이는 말에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 장면 이후 영화가 도달하고 싶은 어떤 지점이 보였습니다. 비록 영화가 그 지점에 무사히 안착한 것 같지는 않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 순수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독의 엉성한 데뷔작임에도, 괜찮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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