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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는 영화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때리고 맞는 과정이 합법적인 유일한 공간인 '링'의 속성이 영화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겠죠. 죽어라고 맞다가 단 한 방에 KO로 보란듯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승부는 시종일관 궁지에 몰리다가 클라이막스에서 뒤집는 액션영화의 플롯과도 통합니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파이터>는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한때 슈가레이 레너드를 다운시킨 적 있을 만큼 뛰어난 권투선수였지만 지금은 마약쟁이인 형 디키(크리스찬 베일 분). 그는 자신을 영웅처럼 따르며 권투선수가 된 동생 미키(마크 왈버그 분)의 코칭을 맡고 있지만 동생은 제때 체육관에 나오지도 않는 형이 미덥지 못합니다. 엄마 앨리스(멜리사 레오 분)는 자칭 미키의 매니저로 시합을 따오지만 미키가 벌어올 돈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아버지 조지(잭 맥기 분)는 우유부단한 가장일 뿐이고, 나머지 일곱 자매들은 병풍처럼 집에서 엄마의 보호 아래 자라고 있습니다. 미키의 주먹에 9남매의 생계가 달려 있는 셈이죠.


훈련을 하는 것 보다 가족과의 트러블이 더 고민인 31세의 파이터. 그에게 가족은 골칫거리이자 시합상대보다도 먼저 때려눕혀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형과 엄마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미워도 그들은 가족이니까요. 그때 미키는 바에서 일하는 여자 샬린(에이미 아담스 분)을 만나 사귀게 되고 그러자 모든 것이 바뀝니다. 당찬 샬린은 미키의 집에 찾아와서 엄마와 일곱 자매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당신들이 미키를 망치고 있어요. 우리는 라스베가스로 갈거예요."


이 영화는 두 커플이 라스베가스로 가서 성공하는 스토리일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성공하지 않더라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그들이 나중에 돌아와 후회할 일을 만들더라도 일단 떠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할리우드답지 않게 정공법을 택합니다. 꼬인 실타래를 풀듯 갈등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겁니다. 미키는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훈련이 가장 중요해요. 나에게 필요한 건 가족이에요." 그러자 앨리스와 디키, 조지와 샬린으로 나뉘어 서로 미키를 차지하려고 싸우던 그들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감옥에서 출소해 새 사람이 된 디키는 샬린을 만나 화해합니다. 갈등이 풀리자 마지막 챔피언 매치의 박진감은 배가됩니다.


데이비드 O. 러셀은 드라마를 맺고 끝는 시점을 정말 잘 아는 감독입니다. 한 순간도 버릴 장면이 없습니다. 따뜻한 형제애와 화해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권투 경기의 긴장감 넘치는 액션에 녹여낸 연출력은 발군입니다. 껄렁껄렁한 디키 역을 해내려 14kg을 감량하고 뒤통수에 땜빵을 만든 크리스찬 베일의 집중력은 놀랍기만 하고, 톡톡 쏘는 말벌 같은 에이미 아담스는 뱃살마저 사랑스럽습니다. 왜 감독이 <아메리칸 허슬>에서 두 사람을 다시 선택했는지 알 수 있는 연기력이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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