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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감독이 고 황유미 씨 부친 황상기 씨의 이야기를 한겨레신문에서 접한 것이 2011년 6월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기사를 보고 나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황상기 씨, 이종란 노무사를 비롯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찾아가 8개월 만에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감독의 전작 <잔혹한 출근>에도 사회적 코드가 있지만 장르적 문법에 많이 묻혔었죠. 초반은 좋았지만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 잡는 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 영화의 감독이 <또 하나의 약속>을 만든 것은 의외지만 생각해보면 <잔혹한 출근>의 실패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사람에게로 직접 들어가서 사람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덕분에 세계 최초로 삼성 백혈병 산재피해자를 다룬 상업영화가 탄생했습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영화보다 영화를 만든 과정 자체가 더 영화 같은 영화입니다. 감독은 완성도 떨어지는 독립영화로 이 영화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중적인 상업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품질이 좋아지려면 당연히 돈과 숙련된 스태프와 연기 잘하는 배우가 필요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단어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선의에 끊임없이 기대야 하는 지난한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선의를 투자하라고 독려하는 일은 박성일, 윤기호 PD와 김태윤 감독이 맡았습니다. 그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탄하지 않았을테죠.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네요.


"최소 10억원 이상은 필요한 영화였는데 종잣돈 1억2천만원으로 그냥 시작해버렸다. 배우, 스탭 다 꾸려졌는데 이 이상 지연되면 아예 무산될 것 같아 일단 시작했다.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을 수 있겠지 싶었다."


일단 촬영 시작했다가 접은 영화는 부지기수입니다. 고생길이 눈에 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 힘겨운 과정을 화면에 드러내선 안 됩니다. 완성도는 완성도 만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프로페셔널한 상업영화의 길입니다. <변호인>이 그걸 완벽하게 해냈다면 <또 하나의 약속>은 70% 정도 됩니다. 대중적인 상업영화로 먹힐 코드를 갖고 있지만 군데군데 작위적인 연출과 빨리 간 테이크를 그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떤 장면은 70년대 계몽영화를 연상시킬 만큼 신파적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영화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신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실화에서 가져온 진정성이 투박하게 담겨 있으니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보일 수 밖에 없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에서 한윤미(박희정 분)의 죽음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옵니다. 갑작스런 죽음에 이후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시킬지 궁금했는데요. 다행히 뒷부분의 투쟁기가 뜨겁지 않고 차분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강원도 사투리, 멍게, 꺾어 마시는 소주, 아들과 화해, 이중적인 진성반도체 직원의 관계 등 영화 곳곳에 재미있는 요소들을 집어넣고 복선으로 만들기도 하는 등 대중적인 문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선동하는 고발영화는 아닙니다. 그게 이 영화의 미덕입니다.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도 각각 사연을 만들어 줬어요. 그 연결고리는 '가족'입니다. 돈 봉투를 들고 찾아오는 이실장(김영재 분)의 핸드폰에도 가족사진이 붙어 있고, 증언을 번복한 김종대(김창회 분)의 계기도 곧 태어날 아기고, 철부지 아들이 돌아오는 계기도 가족입니다.



개인적으로 박철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든 그가 등장하면 튀기 시작하니까요. 그는 어떤 장르의 영화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리는 몹쓸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특유의 툭툭 끊어지는 말투는 연극에서는 좋은 발성일지 몰라도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박철민에 대한 그러한 선입견은 오히려 득이 됐습니다. 박철민이 아니라 다른 배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무거운 영화가 됐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출연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에게 “아빠한테 이런 이야기가 들어왔는데 니가 한번 볼래” 하고 던져줬다. 그러곤 아침에 숙취로 헤매고 있는데 딸내미가 불쑥 다가와 그러는 거야. “아빠 이거 꼭 했으면 좋겠어.” 이제까지 수많은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한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물어봤다. “좋아?” “아니 너무 아파.” “재밌냐.” “쑥 읽히더라.” 그때 출연하기로 마음먹었다. 나한테 이렇게 절실하게 부탁할 정도면 젊은 친구들한테도 먹히겠구나 싶어서.


김규리, 윤유선, 정진영, 이경영, 박혁권 등 좋은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유난주 노무사 역을 맡은 김규리에 눈길이 갔습니다. 광우병 사건으로 한 번 아픔을 겪은 적이 있기에 한국사회에서 논란이 분명할 영화에 과감하게 출연 결정을 했다는 게 의외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뚝심 있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노무사를 연기해 만약 그녀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다시 쓴다면 가뜩이나 <변호인>과 닮은 이 영화가 '변호인' 아니 <노무인>으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개봉을 놓고 진통을 겪은 스크린 수에 대한 논란은 현재 권력이 어디에 있는 지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바로미터로 삼을 만합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시절에 이미 일갈했듯 권력은 경제로 넘어갔습니다. 그중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좋은 면에서든 나쁜 면에서든) 어마어마하죠. 현재 청와대와 법조계, 언론계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중 삼성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힘듭니다. 심지어 다른 재벌들도 삼성맨을 CEO로 영입해 어떤 대기업도 삼성 입김에서 자유롭기 힘듭니다. 개봉관 수에 큰 타격이 없던 <변호인>과 달리 <또 하나의 약속>에서 이런 일이 생긴 이유도 명백합니다. 누가 나서서 지시하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개봉 전 광고와 시사회를 통해 개봉 첫 주 예매율 3위에 오른 영화입니다. 한창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일 때는 예매율을 핑계로 자본주의 하에서 관객이 몰리는 영화에 스크린을 많이 배정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던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이제는 영화의 내용을 문제 삼아 관객의 볼 권리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십시일반 제작비를 모아 만든 상업영화이지만 이미 시작부터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맞붙은 셈입니다.


대기업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이 돈을 모아 몇 천만원, 반도체 연구원이신 분이 아픔과 책임을 느낀다며 또 몇 천만원, 삼성 다니는 분들도 많이 하셨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개인투자자들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올라갑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탄생할 수 없었기에 제작진의 배려라고 하는군요. 재미있는 것은 엔딩크레딧 마지막에 롯데주류 협찬 로고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롯데시네마는 스크린을 닫고 롯데주류는 협찬하고. 뭔가 언밸런스한데 바로 그 사이에 계란이 바위를 넘을 전략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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