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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2013년 최고의 영화 6위. [필름닷컴] 선정으로는 11위. 선댄스 영화제 음향제작상 수상.

"카루스의 수수께끼 같은 SF는 며칠을 풀어내야 할 독특한 논리를 개발해냈다."

“Carruth’s enigmatic SF developed an extraordinary associative logic that left you unpicking the connections for days” — Roger Luckhurst


정말 독특한 소재의 영화를 찾으신다면 <업스트림 컬러>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도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영화를 보시고 나면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매순간 집중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대사가 적고 모든 것이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단서 하나하나를 잘 보고 유추해야 합니다.


감독이자 주연 및 각본, 촬영, 음악, 편집을 맡은 쉐인 카루스는 2004년 <프리머>로 데뷔했는데

9년에 걸쳐 준비했다는 2013년작 <업스트림 컬러>의 세계관은

난해한 타임머신 영화였던 <프리머> 만큼 독특합니다.

카루스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이공계적 마인드는 영화를 설계하는 과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프리머> <업스트림 컬러> 모두 그가 만든 세계의 설계도를 이해해야만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Upstream Color'는 영화 속 식물에 번지는 파란 색깔을 염두에 둔 제목 같은데

사실 영화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돼지의 꿈'이나 '에벌레 생태계' 같은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로 들어가 볼까요?


'식물->애벌레->인간->돼지->식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돈 벌이를 하는 도둑과 피해자들이 생겨납니다.


애벌레가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쉽게 최면에 빠집니다.

애벌레가 들어간 또다른 인간과의 교감 능력도 커집니다. 애벌레가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죠.

여자주인공인 크리스(에이미 세이메츠 분)는 한 도둑에 의해 애벌레를 강제로 먹게 되고 최면에 빠집니다.

도둑이 최면을 걸 때 사용하는 책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입니다.

한 문장씩 받아적을 때마다 최면 상태가 깊어집니다.

[월든]은 법정스님이 아주 좋아했던 책이기도 한데, 최면에 걸려도 이상하지는 않을 만큼 지루한 책이기도 하죠.

아무튼 도둑은 크리스에게 은행에서 돈을 찾아 오도록 시킵니다. 일종의 '에벌레피싱'이네요.


최면에서 깨어난 크리스는 뒤늦게 계좌에서 돈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은행 CCTV에는 자신이 돈 찾는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으니 황당할 뿐입니다.

애벌레 피해자는 서로에게 끌린다고 했죠? 크리스는 제프(쉐인 카루스 분)라는 남자와 가까워집니다.

제프 역시 '에벌레피싱'의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왜 끌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사운드 채집가이자 돼지 사육사입니다.

영화 크레딧에는 샘플러(앤드류 센세닉 분)라고 등장하는 이 남자의 일은 애벌레를 유인하는 사운드를 만들어

불특정한 곳에서 크게 틀어놓고 몸 속에 애벌레가 들어간 사람이 찾아오도록 유인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는 그 소리에 이끌려 샘플러의 농장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샘플러는 돼지의 조직을 떼어내 크리스의 몸 속에 빼낸 애벌레를 집어넣습니다.

이제 크리스와 돼지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몸에서 애벌레가 빠져나갔으니 크리스는 평온함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하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와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고,

임신한 줄 알고 찾아간 병원에서는 오히려 앞으로 영원히 임신할 수 없는 상태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크리스와 제프는 집으로 들어와 욕실 문을 잠그고 손전등만 켠 채 옷을 입은 그대로 욕조에 누워 끌어안습니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게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샘플러는 암컷과 수컷 돼지 사이에서 낳은 새끼가 죽자 냇가에 내다 버립니다.

돼지 시체가 물을 오염시키고 그곳에서 식물이 파랗게 물듭니다.

그 파란 식물을 채집하는 모녀가 그 식물에 E+P Exotics라는 이름을 붙여 팝니다.

도둑은 그 식물을 구입해 애벌레를 키웁니다.

이렇게 하나의 특이한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크리스는 수영을 하다가 무의식 중에 자신도 모르게 외우고 있던 문장들을 뱉어냅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제프 역시 잊혀졌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프는 즉시 크리스가 말하는 문장들을 노트에 적습니다.

그것은 바로 [월든]의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구절들이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크리스가 샘플러를 죽여 생태계의 한 축을 파괴하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월든]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가요? 미지의 세계를 파헤치는 굉장히 독특하고 궁금한 이야기죠?

돼지와 인간이 서로 교감하고, 애벌레가 최면을 걸게 해준다는 상상력이라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영화의 스타일이 스토리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다르덴 형제의 프랑스 영화처럼) 너무 아름답고 세련되어서

정작 이 영화의 강점인 기가 막힌 스토리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좀 더 투박하게, 좀 더 장르 영화답게 만들었다면 쉐인 카루스 감독의 장기가 더 돋보일 수 있었을텐데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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