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잔 콜린스 원작의 <헝거게임>은 <브레이킹 던>처럼 다른 어느 나라보다 북미에서 유독 인기를 얻고 있는 시리즈입니다만 차츰 한국에서도 팬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야기의 배경인 판엠이라는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차츰 그 세계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최근 tvN의 서바이벌 게임쇼 [더 지니어스]를 몰아서 보면서 느낀 점이기도 한데, 사람들이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인물들이 서로 협력하고 배신하는 과정의 긴장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협력하고 믿음을 유지할수록 함께 이길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그런데 '죄수의 딜레마'처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배신하게 되면 동맹은 깨지고, 배신자는 결국 다른 참가자들에게 밉보여 나중에 배신당합니다. 즉, 서바이벌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겠다는 전략'이 아니라 '살아남겠다는 전략'입니다.


<헝거게임>은 서바이벌 게임을 극단의 상황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판엠이라는 독재국가가 체제유지를 위해 지난 75년간 이 게임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서바이벌 게임이 공포정치를 극대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이 이야기의 기저에는 서바이벌 게임이 인간에게 공포심리를 자극한다는 기본 설정이 깔려 있습니다. 마치 '러시안 룰렛'처럼 게임은 누군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판엠의 캐피톨과 12구역의 TV로 생중계되는 이 게임의 시청자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독재정부에 조공을 바치는 각 구역 피지배자들과 캐피톨에서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언제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 로마시대, 그리고 독일의 나치정권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의 이름이나 세트에서도 로마와 나치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TV 진행자의 이름은 시저(스탠리 투치 분)이고, 헝거게임 참가자들은 스파르타 전사 같으며, 반란을 꿈꾸는 자들의 수신호는 로마 시대 황제들의 수신호나 나치 수신호를 섞어놓은 듯하군요.



위 사진은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의 한 장면이고 아래 사진은 독일 나찌의 자료사진입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많은 참조를 통해 만든 세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안타깝게도 <헝게게임: 캣칭 파이어>는 전편의 실수를 반복하는 영화입니다. 게다가 구성도 똑같아서 데칼코마니 혹은 도돌이표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아이맥스 촬영분과 시스템을 파괴하고 3편을 예고하는 엔딩 뿐입니다. 헝거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화면비율이 바뀌면서 아이맥스 화면이 시작되고, 3편을 예고하면서 끝내느라 정작 2편 자체의 완성도는 줄어들었습니다. 한 편의 완결된 영화로서 완성도를 유지하면서도 다음 편으로 연결시킬 전략도 충분히 있었을텐데 영화는 전편의 흥행성공을 의식한 나머지 너무 안전하게 징검다리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실 이 영화의 속편은 제작과정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화 판권을 가진 라이온스 게이트는 지금과 같은 안전한 속편을 원했고, 이에 똑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전편의 감독 게리 로스와 불화가 있었습니다. 결국 게리 로스가 개런티와 스케줄 문제를 이유로 하차하게 되고, <콘스탄틴> <나는 전설이다>를 만든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이 합류했습니다. (그는 <헝거게임: 모킹제이> Part 1,2 모두 감독을 맡게 됩니다) 영화는 감독이 달라졌음에도 1편과 아주 유사한 패턴으로 진행됩니다. 덕분에 스토리에 집중하기는 아주 쉬워졌습니다.


<헝거게임> 시리즈의 최대 강점은 감수성을 가진 여전사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 분)이 혁명의 아이콘이 된다는 설정입니다. 자칫 <배틀로얄>처럼 격해질 수 있는 서바이벌이라는 소재와 <레미제라블>이나 <브이 포 벤데타>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는 혁명이라는 소재를 한 소녀의 시점으로 묘사함으로서 감성적인 분위기 속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1편에서 그녀는 사랑의 힘으로 헝거게임의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편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모두가 기다려왔던 선지자로 추앙받습니다. 반란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쏘아준 것이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판엠의 지배자 스노우 대통령(도날드 서덜랜드 분)은 그녀를 제거하려 합니다. 그래서 75주년을 맞아 '왕중왕전'을 펼칩니다. 즉, 지금까지의 생존자들이 다시 참가하는 스페셜 헝거게임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다른 독재국가와 달리 영화 속 판엠에는 악당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 게임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채찍을 들고 다니는 12구역에 파견된 평화집행관이요? 그는 전사일 뿐이죠. 영화 속에서 스노우 대통령 혼자만 명령하고 있는데 그가 이 모든 악의 근원을 담당하기에는 카리스마도 약하고 비중도 작아 보입니다. 그에게는 명령을 떠받드는 참모조차 보이지 않아요. 새로운 게임 설계자인 플루타치(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가 그 역할을 하나 싶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다른 속셈이 있었죠. 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강력하고 그들의 신념이 확고해야 무너뜨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판엠의 세계는 신봉자가 적습니다.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누가 불꽃을 당기느냐만 남은 셈이었죠.


오히려 75년을 지배당해온 피지배자들이 너무 온순합니다. 수신호를 보냈다는 이유로 광장에서 무고한 사람이 처형당하는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다는 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보통 시민혁명은 누구 한 사람이 주도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혁명의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영웅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을 독립시킨 조지 워싱턴도 난세 속에 탄생한 영웅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미국인들은 늘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핍박받는 민중이 영웅을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건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험한 시혜의식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미국이라는 영웅이 아니었으면 세계지도는 바뀌지 않았을 거라는 자신감이죠. 수잔 콜린스가 [헝거게임]을 쓰는 모티프가 된 이라크 전쟁도 미국이 영웅 되려다가 망신당한 전쟁이었죠. 미국인들(혹은 미국 작가들)에게는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이 필요한가 봅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혁명의 아이콘이 된 캣니스는 영화 초반에는 멘토로서의 삶을 살고 엔딩에 이르러서는 혁명의 아이콘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멘토로서의 삶은 체제유지를 위해 캐피톨이 명령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캣니스의 멘토였던 헤이미치(우디 해럴슨 분)는 그렇게 25년을 살아와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인생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서바이벌 게임 생존자의 삶은 대중에게 거짓 웃음과 꿈을 팔아야 하는 스타로서의 삶과 닮았습니다. 인간에겐 양심이 있어 다른 사람을 죽이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련된 자본주의 체제는 이를 시스템으로 교묘하게 포장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죠. 그런 점에서 전편의 리뷰를 쓸 때도 한 번 언급했지만, 판엠의 캐피톨이 12구역 서바이벌 헝거게임 쇼를 개최하는 것이 스스로 얼마나 낙후된 체제인지를 증명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독재자로서 피지배자들의 반란이 무서웠다면 공포가 아니라 환락에 빠지게 했어야죠.


마지막으로 삼각관계에 대해 따져봅시다. 도대체 캣니스는 뭐하는 여자인가요? 캣니스에게 게일 호손(리암 헴스워스 분)은 어떤 의미인가요? 함께 도망가는 것을 거부한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아무 감정 없이 위장결혼하는 것처럼 보였던 피타 멜라크(조쉬 허처슨 분)와는 왜 갑자기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되었나요? 고마움 혹은 연민인가요? 아니면 정말 사랑에 빠진 건가요? 도대체 누가 그녀의 감정상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이 많은 영화지만, 애초 4부작으로 기획된 대작인 만큼 이 영화에는 곳곳에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그중 의상과 소품 같은 디테일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캣니스를 응원하는 스타일리스트 시나(레니 크라비츠 분)의 불꽃 의상, 12번 구역을 에스코트하는 에피 트링켓(엘리자베스 뱅크스)의 헤어스타일과 골드 펜던트 역시 인상적입니다. 또, 콜드플레이,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시아, 이매진 드래곤스 등이 참가한 음악도 풍부합니다. 아래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은 콜드플레이의 감성 충만한 'Atlas' 사운드트랙 뮤직비디오를 들어보세요. 콜드플레이가 영화 OST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는군요. 헝거게임 왕중왕전이 시작되면서 조한나 메이슨(지나 말론 분), 피닉 오데어(샘 클라플린 분), 비티(제프리 라이트 분)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줄줄이 등장했는데 올해 11월 개봉할 3편 Part 1에서 더 활발해질 이들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