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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은 '공감'에서 온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말보다는 행동이다.


짊어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뒤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불편부당함에 맞서 홀로 돌을 던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함께일 때, 감동은 배가 된다. 우리의 삶에서 감동을 주는 사람은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있고 송우석처럼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던 동료들일 수도 있다.



"이날 법정에는 부산 지역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출석했다."


영화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문구다.


판사가 이름을 부르고 변호인들이 일어나며 외치는 "네"라는 짧은 단답형 문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벌써 800만 명이 <변호인>을 봤고, 두 번 세 번 반복 관람하는 관객도 많다. 문재인 의원도 부림사건 실제 피해자들과 함께 관람했고, 여야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짧은 평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개봉 초기에 친노 진영의 영화로만 인식될까 우려하던 제작사는 영화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자 안도하는 모습이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의 책 판매량이 뒤늦게 급증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이 영화가 불편한 사람도 있다. 영화에서 조민기가 분한 검사 역할의 실제 인물로 '공공의 적'이 된 최병국 전 새누리당 의원은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더니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폐쇄하며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혔다. 안철수 의원 측 새정치추진위원회의 이계안 공동위원장은 "영화는 '아트(예술)'이지 '프로파간다(선동)'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영화를 폄훼하기도 했다.



영화 제작진은 <변호인>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감독과 배우가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어서 그렇지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노무현재단의 검토를 거쳤고, 변호사 사무실이나 집 서재 등 배경이 된 장소도 실제 고인이 살았던 현장을 충실히 재현했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는 분명히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까지하다.


1987년 9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부산지검공안부는 박종철군 추모제때의 시위에 적극 개입했으며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 장례기간 동안에도 시위농성을 조종한 혐의로 노무현씨를 구속했다." 당시 법정에서는 영화에서처럼 문재인 변호사의 주도로 99명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공동변호인단이 출석해 이름이 불리워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 결과 노무현은 풀려났지만 변호사 자격은 정지돼 이후 정치인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 속 사건 대부분은 실제 벌어진 일과 유사하다.


판사 하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한 노무현, 상고 출신으로 주위 변호사들에게 무시당했던 노무현, 당시 변호사가 하지 않던 등기와 세법 업무를 하며 명함을 돌렸던 노무현, 올림픽에 나가려고 요트를 배웠던 노무현, 국밥집에서 밥값을 내지 않고 도망갔던 노무현, 시국에 무심하다 변호사가 모자라 부림사건에 참여했던 노무현, 당시 리영희와 E. H. 카의 책을 읽고 의식화된 노무현,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열변을 토했던 노무현, 그리고 두달 간 부둣가 여관에서 감금 고문당한 피해자 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부림사건 당시 피해자 증언과 김광일 전 의원의 회고록 등을 종합해볼 때 실화에 가깝다. 이쯤되면 모티프를 따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실화에 픽션을 살짝 가미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허구인 부분은 국밥집 엄마와 아들로 인해 부림사건을 맡게 된 것,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안, 군의관의 양심고백, 외신기자 참석 정도다. "알리하고 포먼이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편을 들었을 때 피고인도 알리 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고 묻자 최병국 검사가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자제해 주십시오"라고 소리친 것 역시 실제 재판과정에서 있었던 일화고, E. H. 카가 소련에서 영국의 외교관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을 영국 대사관을 통해 문서로 확인한 일화는 노무현 변호사의 다른 재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렇듯 <변호인>이 두 번 세 번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모으는 힘의 원천은 이것이 '실화'라는 사실에 있다. 1980년대의 상황과 별반 나아지지 않은 작금의 암울한 현실을 마주보면서 99명의 변호인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날 100번째 사람이 되고 싶다는 '행동으로서의 공감'이 곧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에린 브로코비치> <쉰들러 리스트> <데드맨 워킹> <어퓨굿맨> <도가니>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떠오르는데, 현실에 무지한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잔혹한 현실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변호인>과 닮았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영웅이 되기도 하고 무력감에 빠져 좌절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무지에서 시작한 행동 하나하나가 차곡차곡 쌓여 버팀목이 될 때 비로소 계란 하나가 죽은 바위를 넘기도 하더라는 그런 평범한 진리를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읽을 글 >> 변호인, 노무현이 되기 전의 노무현을 만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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