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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들쭉날쭉합니다. 좋을 때는 너무 좋고 별로일 때는 참 별로입니다. 하긴 매년 2~3편씩 찍는데 일정한 퀄리티를 낸다는 게 오히려 더 힘든 일이겠죠. <오디션>이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이치 더 킬러> 같은 멋진 영화를 보면 이런 영화를 계속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지만 <크라우즈 제로> <용이 간다> 같은 영화는 감독에 대한 신뢰를 배반합니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가 싶던 감독이었는데 그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최근작은 좋습니다. 예전 전성기때의 충격적인 이미지는 없지만 좀더 완숙한 영상과 묵직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가 돌아온 것은 2011년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 때부터인 것 같네요. 약간 긴가민가했지만 무게가 느껴졌죠. 그리고 내놓은 <악의 교전>과 <짚의 방패>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이지만 감독의 과거 명성에 부합하는 영화입니다.



악의 교전


기시 유스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소설과 달리 영화의 스토리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1년전에 부임한 4반 담임 교사 하스미(이토 히데아키 분)는 잘 생기고 다정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한 여학생은 그를 너무 좋아해 하스미는 그 여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싸이코패스라는 것입니다.


동료 교사 중 한 명이 그의 과거를 의심해 캐기 시작합니다. 무려 하버드 유학생이 일본 고등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거든요. 더구나 이전에 선생이던 학교에서는 베르테르 효과로 학생들이 연쇄자살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과거를 캐던 교사는 지하철에서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한 여학생이 그 교사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거라고 의심합니다. 하스미는 이 여학생을 처리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이 틀어지고 결국 그는 학급 전원을 사살하기로 결심합니다.


<배틀 로얄> <고백> 등 학생들이 살육전을 벌이는 어떤 일본영화의 전형(?)이 떠오릅니다. 그 영화들과 <악의 교전>이 다른 점이라면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하게도 선생이 싸이코패스라는 것입니다. 학생들간의 시기, 질투, 컨닝, 왕따, 이지메, 성희롱 등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양념에 불과합니다. 선생은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을 그냥 죽입니다.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의 주제곡 '모리타트'는 아름다운 선율과 달리 연쇄살해범 맥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주제곡이 하스미의 테마로 무차별 학살극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기시 유스케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에는 학생들의 사연과 학교의 문제가 구구절절하게 등장하지만 영화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선생의 이중성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악의 교전>은 싸이코패스의 시선에서 본 싸이코패스 영화입니다. 따라서 지금껏 으레 싸이코패스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왔던 형사는 이 영화에서는 거의 역할이 없습니다. 아쉬운 것은 미국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잔인함을 상징하는 이미지로만 나올 뿐 캐릭터의 치밀함을 설명하는 데에는 쓰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선생의 매력에 비해 캐릭터 구축에 좀더 신경을 썼으면 하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스미는 학생들을 쏴 죽인 뒤에도 계속해서 확인사살을 합니다. 이런 꼼꼼함은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서 죽은 줄 알았던 캐릭터가 되살아나는 클리셰에 대한 감독 나름의 비판입니다. 그런데 하스미가 어떻게 이렇게 꼼꼼한 성격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대량학살극이 벌어지면서도 전반적으로 그다지 음침하지 않은 분위기로 끌고간 것은 좋았지만 싸이코패스에게 반전매력을 주려다보니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부분은 못내 아쉽습니다.


(스포일러 경고!) 학급 전원을 살해하면서도 완전범죄를 꿈꾸던 하스미는 결국 꾀를 부려 살아난 두 명의 학생으로 인해 경찰에 붙잡힙니다. 이때 하스미는 모든 것이 신의 의지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속편을 의식한 것입니다. 속편에서는 하스미의 과거가 드러나게 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짚의 방패


원작은 키우치 카츠히로의 동명 소설입니다. 돈과 복수에 관한 일종의 게임이론 같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쓰레기인 놈을 죽이면 지금껏 나를 살게 해온 내 의지도 죽여야 합니다. 그걸 알고 있는 놈은 그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7살난 여자아이를 강간해 죽인 살해범이 있습니다. 죽은 소녀의 할아버지는 일본 재계 거물입니다. 심장병에 걸린 그는 범인이 기요마루(후지와라 타츠야)인 것을 알아내고 현상금을 내겁니다. 신문사의 광고국 직원들을 돈으로 매수해 퇴직시키고 전면광고를 바꿔넣습니다. "기요마루를 죽이는 자에게 10억엔을 주겠다."


이제 일본 사회가 들썩입니다. 사람들은 10억엔을 받기 위해 기요마루를 죽이러 나섭니다. 기요마루는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 자수합니다. 경찰은 그를 도쿄 경시청으로 이송하기 위해 경시청의 특별 경호원 메카리(오사와 타카오)와 시라이와(미츠시마 나나코)를 투입합니다. 그들은 과연 범인을 무사히 도쿄로 이송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이 살해범이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그들의 적은 돈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중소기업 사장, 병원비가 필요한 간호사, 도박 빚에 시달린 경찰, 같은 범인에게 딸을 잃은 아빠 등입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으니 바로 경찰 그 자신들입니다. 돈의 유혹에 누가 적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고 모두들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하기 버겁습니다. 이미 많은 영화들에서 표현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경찰'은 이 영화가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지킬 가치가 없는 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인가, 범인을 죽임으로써 부자가 빈자를 돈으로 조종하는 사적 복수의 전시품이 될 것인가. 직업 윤리가 우선인가 공공의 적이 우선인가. 이런 명백한 딜레마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담겨 있어 보는 내내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가면서 범인이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영화가 관객의 고민을 대신 해결해준다는 점은 명백한 것을 좋아하는 관객에겐 장점으로, 고민을 더 하고 싶었던 관객에겐 단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만약 범인을 반성하는 사람으로 그렸으면 아마도 이 딜레마는 좀더 복잡한 영역에 도달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늘 권선징악이 뚜렷합니다. 감독은 범인을 끝까지 변하지 않는 악인으로 그리고 있어 뇌리에는 강렬하게 남았지만 생각보다는 단순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슬픔과 분노를 억제하며 직업에 충실하려 하는 메카리 역의 오사와 타카오의 연기는 영화에 묵직한 힘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클라이막스에서 범인을 죽이고 싶은 분노와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감정이 서로 충돌할 때의 포효는 절절해서 창문이 깨지는 듯한 잔상을 남깁니다. 영화를 이 장면에서 끝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마도 그랬다면 영화가 범인을 죽일 것이냐 말 것이냐의 한 가지 질문만을 던지는 이야기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후반부에 재계 거물이 등장해 직접 사적 복수를 하려 함으로써 영화는 비로소 피해자의 고통에 다가섭니다. 이 후반부는 영화의 질문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는 패착임과 동시에 피해자의 슬픔을 마주보는 시도입니다. 후반부가 없을 때의 강렬함보다는 있음으로서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주는 쪽이 아무래도 미이케 다카시 스타일과 더 어울립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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