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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3들의 세태를 보여주는게 목적이었다면 <명왕성>은 제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세계이고 글자로만 아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미지로 대했을 때의 파괴력은 꽤 큽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후 <여고괴담> <말죽거리 잔혹사>까지 '공부에 파괴당한 인간성'이라는 주제는 한국 학교영화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이 영화도 그 계보를 따르고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다른 영화와 달리 토끼몰이하듯 학생들을 몰아놓고 결국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거죠.


<명왕성>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일본 영화 <배틀 로얄>과 한국 독립영화 <유에프오>입니다. 전자에서는 학생들의 경쟁이 극에 치달아 결국 서로 죽고 죽인다는 극단적인 상상력이 닮았고, 후자에서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스릴러 장르를 차용하는 방법이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명왕성>은 두 작품의 명성에 걸맞는 완성도를 만들어 냈을까요? 장점은 뚜렷합니다만 그 이상의 단점도 보인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우선 '명왕성'의 상징성은 좋았습니다. 명왕성은 태양계에서 퇴출된 소행성입니다. 명왕성이 퇴출된 이유는 다른 행성과 달리 궤도가 타원형이고, 질량이 지구의 달 정도로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중 결정적인 이유는 질량보다는 궤도였습니다. 심한 타원형이어서 태양을 돌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명왕성과 비슷하게 작은 소행성들이 태양계 내에 수없이 많다는 거죠. 어쨌든 태양계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퇴출됐으니 감상적으로 '비운의 행성'으로 칭한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은유입니다. 이사회에서 탈락한 임원이나 친구들의 무리에서 탈락한 다자키 쓰루쿠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영화 속에서 김준은 '명왕성을 위한 변명'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합니다. 아마도 자신을 비운의 명왕성에 감정이입하는 듯합니다. 비록 명왕성이라는 상징에 비해 김준의 행동이 과격하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그 정도야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 모르죠. 언젠가 명왕성이 궤도를 이탈해 거대한 목성을 향해 돌진해 태양계를 박살내려 할 지도요.


또다른 장점은 스릴러라는 형식과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저는 영화 보는 내내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잘 만든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긴장시키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요. 긴장감은 뒤에 어떤 장면이 올지 모른다는 기대 또는 불안과 불편함에서 옵니다. 범인이 누구일까에서 시작해 왜 그랬을까로 궁금증을 발전시키는 스릴러는 이 영화에 궁금증을 유발하는 괜찮은 장치였습니다. 젊은 배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이 좋았습니다. <시>와 <더 테러 라이브>에 이어 계속 성장하는 이다윗, 공부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음에도 1등이라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반항아와 모범생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춘 배우 성준, 가장 재수없는 캐릭터를 가장 재수없게 연기한 김권, 사랑스러우면서도 얄미운 캐릭터를 오락가락한 선주아, 신비한 소녀이자 외유내강 캐릭터 김꽃비. 이런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엇나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우선,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어정쩡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김준(이다윗 분)은 김선주(선주아 분)를 명왕성의 위성 카론에 비유하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카론은 후반부에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요. 유진(성준 분)이 카론과 명왕성은 서로 마주보지 못한다고 한 마디 할 뿐인데요. 그 대사는 김선주를 겨냥한 것도 아닙니다. 카론이라는 멋진 상징을 너무 안일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명왕성을 영화의 주요 모티프로 사용했으면서 카론은 홀대하는 설정은 스토리상의 결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또, 이 영화는 우등생 무리에 끼어들고 싶은 강북 우등생(?)의 설정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갈등을 만드는 방식은 굉장히 원시적인 살인과 마녀사냥입니다. 후반부에서 집단 살인이 벌어지면서는 아예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왕성>이 마녀사냥에 의한 살인을 파헤치는 영화로 기획됐다면 지금과 다른 관심을 끌었겠죠. 하지만 <명왕성>은 분명히 한국의 교육 현실에 관한 영화로 알려졌잖아요. 미국 하이틴 영화 중에 이렇게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다가 서로 배신해 죽고 죽이는 호러 영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의 컨벤션이 너무 드러나 있어요. 그렇다면 그런 컨벤션이 제대로 자리잡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이틴 호러영화들 중 하나로 보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되게 밋밋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쓸데없이 극단적이거나 혹은 너무 차분하거나. 둘 사이의 중용의 자리를 차지하기엔 영화의 야심이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거죠. 마치 전혀 다른 궤도를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예산 영화의 '화면빨' 만큼은 인정합니다. 독립영화의 퀄리티가 상업영화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말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에프오>와 <파수꾼>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느껴지는 장점이죠.


PS) 영화 속 대사 중에 '별'이라는 단어를 명왕성을 지칭하며 쓰고 있는데 엄밀히 별은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말하는 거죠. 빛을 발산하지 못하는 지구나 명왕성은 모두 '별'은 아닙니다. 최고 엘리트인 유진이나 과학자의 꿈을 키워가는 김준이 별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니, 제가 천문학이나 우주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이런 과학적 디테일에서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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