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계유정난은 최근 드라마 [공주의 남자]와 [인수대비]에 등장해 친숙하다. 아마도 숙종시대의 장희빈과 함께 가장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진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 아닐까. 그만큼 드라마틱하고 해석 방식에 따라 현대에 주는 시사점도 있다.


2. 작년에 만들어진 <광해>와 <관상>은 거의 같은 영화다. 속편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위기의 궁궐로 들어간 허구의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팩션인데 개봉 시기도 추석으로 똑같다. 한 평범한 남자가 조정에 관여하나 왕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역모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권력무상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분상승'의 스토리와 '의리와 정의', 그리고 '지켜야 할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광해>는 작년 대선 시즌과 맞물려 광해를 노무현에 비유하는 정치적인 해석을 낳았지만 <관상>에는 아쉽게도 현대와 연결된 정치적인 뉘앙스가 없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마지막 장면 바다의 파도에 권력을 비유하는 김내경(송강호 분)의 대사가 공허하게만 들리는 지도 모른다.


3. 한명회는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영화를 열고 맺는 자리에 한명회를 놓은 것은 관상가 한 마디의 말에 안절부절하는 한명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권력의 무상함을 풍자하기 위함일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는 인상적인 오프닝과 엔딩이다. 한명회 만큼 드라마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도 드물다. 1984년 MBC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에서 정진이 책략가 한명회를 연기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1994년 [한명회]라는 사극이 이덕화 주연으로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근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가놈(조희봉 분)이 마지막회에 자신의 본명이 한명회라고 밝히면서 뒤통수를 쳤다. <관상>의 한명회는 [뿌리깊은 나무]의 한가놈과 닮았다. 정체를 밝히지 않다가 마지막에 나타나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모습이 그렇다.


4. <관상>은 영진위의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정작 만들어진 영화의 스토리는 빈약하다. 특히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밑천을 드러낸다. 수양대군이 아들의 눈을 멀게 하고 이를 오해한 처남이 일을 그르친다는 설정은, 글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갈등을 만들기 위해 김내경의 가족사를 일부러 집어넣은 것 같은 모양새가 썩 자연스럽지 않게 보인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두 아들을 죽인 것으로 역사에 기록된 그날 밤의 쿠데타도 지나치게 단조롭기 짝이 없다.


5. 빈약한 스토리에도 영화의 긴 러닝타임(139분)을 견딜 수 있도록 채워준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송강호 이정재 김혜수 조정석 백윤식 이종석 김의성... 누구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하고 있다. 송강호-조정석 콤비는 찰떡궁합이고, 김혜수와 백윤식은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를 제대로 살린 맛깔난 연기를 보여준다. 이정재의 카리스마도 마냥 건드러지지만은 않아서 좋았다. 예전 이정재가 영화 속에서 거들먹거릴 땐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확실히 <신세계> 이후 이정재는 영화의 흐름에 그대로 녹아들 줄 안다.


6. 이 영화가 아쉬운 것은 '권력무상'이라는 오래된 테마를 다시 꺼내들면서 스토리마저 과거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래된 테이프를 반복 재생하는 느낌이랄까. 비슷한 많은 종류의 영화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그마저 만듦새가 빈약하다. 왜 권력은 항상 무상해야만 하는지, 왜 권력자의 욕심은 바람을 보지 못하는 파도에만 비유되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바람이란 무엇인지, 바람을 볼 수 있는 지혜란 무엇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질문이나 답은 영화에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영화는 괜시리 거창한 질문만 해대고 있다. 캐릭터 자체도 발전 없이 관습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 영화의 후반부가 참 공허하게 느껴진다. 쿠데타가 끝난 후 김내경은 수양대군에 엎드려 복종하며 목숨을 구한다. 그렇게 구한 목숨으로부터 회상하는 인생의 교훈이라면 뭔가 더 냉소적인 게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초반부의 재치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가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7. 마지막으로 '관상'에 대해. 영화에서 김내경은 점을 찍거나 인상이 바뀌는 것만으로 관상과 미래가 바뀐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형수술이 횡행하는 현대사회에서 관상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걸까.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가 더 와닿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