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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들에게 인기 많은 작가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비행운].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침묵의 미래]의 무거움에 비하면 질량은 가볍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슴 속에 파고드는 속도가 더 느리지는 않은 그런 책이다.

가난과 여성 심리에 대한 꼼꼼한 묘사, 세심한 복선, 인간 관계에 대한 애정, 또 의외로 기발한 소재에 읽는 재미까지 쏠쏠하다.

왠지 그녀의 책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짧지만 완결된 구성과 상징적인 사건들에 대한 탁월한 묘사력 덕분인 것 같다.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비행운'처럼 책을 덮으며 짧지만 강한 여운이 흔적처럼 남았다.


이 책의 단편들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 순위를 매겨보자면

호텔 니약 따 > 서른 >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큐티클 > 하루의 축 > 너의 여름은 어떠니 순.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학창시절 좋아했던 선배의 부탁 전화를 받은 여자의 어느 설레는 여름. "고개 좀 들어 녀석아" 라는 문장이 이렇게 웃길 수 있을 줄 몰랐다. 학창시절 그녀는 수줍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이제 그녀는 방송국 AD가 된 선배의 먹기대회 녹화에 참가하며 차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벌레들

벌레가 나오는 장미빌라에 사는 신혼부부. 인근 재개발로 단독주택이 헐리고 반지를 주우러 내려갔다가 산일을 맞는다. 기이한 엔딩이 인상적.


물속 골리앗

장맛비가 계속 내려 아파트가 물에 잠긴다. 비 때문에 아빠가 죽고 나는 엄마를 구출해야 한다. 방문을 뜯어 배를 만들어 아파트를 탈출한다. 그러나 엄마 시신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나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비와 집에 관한 상상력의 산물.

"새삼 물에 잠긴 도시란 게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 곳일지 그려졌다. 인간이 지상에 이룩한 것과 지하에 배설한 것이 함께 엉기는 곳. 짐승의 사체와 사람 송장은 물론 잠들어 있던 망자들의 넋마저 흔들어 뒤섞어버리는 곳. 그런 데라면 결코 빠지지도,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P.96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용대는 테이프를 들으며 중국어 회화 공부를 하는 택시기사. 보증 잘못 섰다가 집안의 돈 날리고 버림받은 자식이 된 그는 조선족 명화와 사랑에 빠진다. 중국어 회화 테이프는 암에 걸린 그녀의 육성 녹음이었던 셈. 한 달 동안의 질퍽한 사랑. 그리고 검사가 된 서먹한 조카를 태워주던 그의 어떤 하루. 녹음 테이프가 짠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영화 <파이란>스러운 로맨스.


하루의 축

인천공항에서 청소 노동을 하는 아줌마의 생활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공항이라는 공간에 대한 감성적인 포착. 누군가 화장실에 버리고 간 먹지 않은 마카롱을 그녀는 추석 선물처럼 받았다. 정수리 부분이 다 빠진 머리를 가린 두건을 벗은 줄도 모른 채 그녀는 마카롱이 너무 달아 눈물이 났다. 공항을 관찰하며 쓴 문장이 아름답다.


"현대의 복잡하고 거대한 시스템이 정적으로 평화롭게 돌아갈 때, 그 무탈함이 주는 이상한 압도, 안심, 혹은 아름다움 같은 것이 공항에는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길게 뻗은 고속철도나 우아한 현수교, 송전탑에서도 느꼈다. 시커먼 타이어 자국이 밴 활주로 사이로 휘이- 시원한 가을바람이 지나갔다.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불어와 어떤 세계로 건너갈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민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큐티클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여자는 큰 맘 먹고 네일샵을 찾는다. "열 번 하면 한 번 공짜에요." 그러나 가격이 부담스럽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여자들 앞에서 소심하기만 한 그녀는 "다시 오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결혼식장에 가서 네일아트를 자랑하려 손을 들어보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네일아트를 알아본 건 거리에서 저축은행 신용카드를 모집하는 아주머니. 그녀의 겨드랑이엔 자기처럼 땀이 흥건하게 배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주 평범하기만 한 일이 자신에겐 너무 특별한 것일 때, 공감은 결국 계급 문제다. 나는 카드를 만들고 사은품 여행가방을 들고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로 한 친구와 남산타워를 찾는다. 하이힐에 여행가방을 들고 남산타워를 찾는 부조화는 상징적으로 또 계급문제다. 친구는 결국 여행을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도 지지 않고 대답한다. "나도 원래 여행 따위는 좋아하지 않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의 묻혀진 자존심. 손톱의 죽어 있는 피부인 큐티클 같은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긴 단편.


호텔 니약 따

은지와 서윤은 동남아 여행을 떠난다. 사이 좋았던 두 여자 친구는 그러나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한다. 은지는 영어 못하는 서윤이 부끄러웠고, 서윤은 자기 감성을 몰라주는 은지에게 짜증이 났다.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날, 은지는 호텔 니약 따에 가자고 서윤을 설득한다. 가격은 비싸지만 이 호텔에는 비밀이 있다. 이 집에 묵으면 보고 싶어하던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날밤 꿈에 서윤은 죽은 할머니를 만나는데 할머니는 죽어서도 여전히 폐지를 줍고 있어 눈물이 났다. 마침내 마지막 여행지인 베트남에 도착하자 서윤과 윤지의 감정은 폭발하고 이제 그들은 여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알지 못한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공항 의자에 두세 칸 떨어져 앉아 있다.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루한 거였어."

"1700년대 바흐가 작곡한 음악을, 2000년대 캄보디아에 온 한국 여자가 1900년대 글렌 굴드가 연주한 앨범으로 듣는다. 이상하고 놀랍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계는 원래 그렇게 만날 일 없고 만날 줄 몰랐던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P.277


서른

자취방을 여섯 번 이사다닌 가난한 여자 강수인이 화자. 선배인 언니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 불문과를 졸업했지만 할 일이 없어 면목동에서 학원 강사를 하다가 다단계 업체에 들어선다. 자기를 잘 따랐던 혜미라는 학생을 끌어들였지만 혜미는 자살시도를 하고 식물인간이 되어 있다. 씻을 수 없는 과오로 차마 병원을 찾을 수 없는 화자는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 앞으로의 인생도 이렇게 힘든 걸까. 그녀는 학창시절 밝기만 했던 혜미를 떠올렸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진짜 일상에서 소비하는 브랜드를 밝히고 가격을 적고 뚜레쥬르 적립카드 등 생생한 묘사는 가난을 즉각적으로 인지하게 한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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