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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은 은둔하며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녀의 방에는 화양시의 지도와 메모가 빼곡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가지는 확실히 대단하다. 큰 스케일 속에서 취재와 자료를 이야기로 녹이는 능력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것은 바로 맛깔스런 문체다.


난 책에 밑줄을 긋는 대신 좋은 문장을 웹노트에 적어놓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은 별로 적어 놓을 만한 문장이 없었다. 초반의 아이디어 몇 개가 전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이 책은 2장까지만 읽어도 된다. 그 뒤로는 줄거리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못내 아쉽다. 더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한 것이.


화양은 다섯 개 산과 열두 개 봉우리 안에 들어앉은 분지 도시였다. 재형은 도로 하나로 서울 북쪽과 내통하듯 몸을 맞댄 이 도시의 하늘이 갑갑할 때가 있었다. 꿈길을 배회하다 깬 새벽에는 더욱 그랬다. 그럴 때마다 동물 묘지가 있는 드림랜드 뒤편 숲에 올라가고는 했다. P.114


화양이라는 사방이 산으로 막힌 도시에 전염병이 퍼지면서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이 도시를 봉쇄한다. 고립된 시민들 속에 서재형이라는 개 사육자, 링고라는 야생 늑대개, 한기준이라는 의지 강한 소방대원, 김수진이라는 불운의 간호사, 김윤주라는 씩씩한 신문기자, 그리고 박동해라는 망나니가 있다. 챕터마다 여섯 개의 시점을 돌아가면서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은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또 시점이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같은 상황을 여러 입장에 맞춰 중언하게 되어 있는데 그 과정을 최대한 간추린 덕분에 반복된 느낌은 덜하다. [7년의 밤]에서 그랬던 것처럼 앞에서 생략한 부분을 뒤에서 꼼꼼하게 보충함으로서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드는 정도로만 사용됐다.


"유신 정권도 아니고, 공산당 정권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수도권 도시를 봉쇄해버리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이..."

"가당하지. 화양 전체를 빨간 눈의 숙주로 본다면."

팀장의 말에 윤주는 헉, 소리를 토할 뻔했다. P.229


고립된 화양을 보면 1980년 광주가 떠오른다. 게다가 빨간 눈의 전염병이라니. 너무나 명백한 상징 아닌가. 다섯 번째 챕터에서 시청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바리케이드로 돌진한다. 기존 광주 문학과의 차이점이라면 이 책은 핍박당하는 시민을 다루었다기보단 그 비극적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해 놓고 그 안에서 인물들 간의 꼬리를 무는 인과관계를 더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면 받게 돼 있는 게 인간의 습성 아니던가. 동행이 멀어지면 허둥지둥 쫓아가는 것 또한 그렇고. P.65


취재 갔던 윤주는 재형과, 스타를 쫓던 재형은 링고와, 스타의 복수를 하려는 링고는 기준과, 부인과 딸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기준은 수진과, 개를 죽이려 혈안이 된 동해는 윤주와 각각 관계를 맺는다. 대부분 죽어나가는 거대한 비극 속에 이들은 희망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위로하거나 혹은 생을 포기할 만큼의 집념으로 복수의 칼날을 간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쓴 초고는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강해서 그걸 다 버리고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썼다고 한다. 그녀는 현실에서 구제역으로 살처분당한 돼지들 만큼이나 가상의 소설에서 개도 전염병에 걸리면 살처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서 이 거대한 비극이 출발했다. 그녀는 누군가는 개들을 위해 희생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원구상을 버리고 인물관계를 다시 짰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물들의 집념이 너무 강한 것이 이 소설의 패착이 아니었나 싶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돌고 있고 지역이 고립되었는데 그 상황보다 이들의 개인적인 복수심이 더 강하게 느껴져 후반부로 가면 정작 전염병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정유정 작가의 소재에 대한 집념 만큼은 높이 사줄 만하다. 알래스카의 낯선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와 드림랜드에서 유기견들을 돌보는 생활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은 동물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28]에서 아래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개의 시선으로, 개에 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문장이었다.


재형이 아는 쿠키는 세상에서 가장 요란하게 삶을 즐긴 개였다. 마당을 지나는 쥐 한 마리에 흥분해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리기 일쑤였다. 등털을 잔디처럼 곤두세우고, 눈을 서치라이트처럼 번쩍이며 쥐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다녔다. 드림랜드의 고양이들은 할 일이 없었다. 더하여 타고난 도둑이었다. 특히 배달 음식 낚아채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언젠가는 피자 상자를 받아두고 잠깐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돌아서보니 피자 상자가 열려 있고, 숲에 있으리라 여겼던 쿠키가 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녀석의 이빨엔 피자 조각으로 보이는 노르스름한 것이 걸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것은 꿀꺽, 소리와 함께 목구멍으로 빨려들어 갔다. 삼키자마자 '나 아무것도 안 먹었어' 하듯 입을 벌리고 싱글싱글 웃으며 온몸이 요동할 정도로 꼬리를 흔들었다. 물개처럼 촉촉한 눈으로는 남은 피자를 바라보면서. P.174~175



28
국내도서
저자 : 정유정
출판 : 은행나무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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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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